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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끝나도 마음속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전 이름조차 흐릿해진 사람인데도 그때 계절 빛깔과 바람결은 여전히 생생하다. 왜 우리는 첫사랑을 쉽게 잊지 못할까?
미국 기억 전문가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기억 구성 이론(Reconstructive Memory Theory)’은 이유를 조용히 설명한다. 그녀는 기억이 고정된 기록이 아니라 감정과 상상, 현재의 해석이 더해져 계속 다시 쓰이는 얘기라고 말한다.
첫사랑은 감정의 파장이 가장 크던 시절에 자리 잡는다. 감각은 선명하고 모든 순간이 처음이었기에 마음은 깊이 흔들렸다. 그리고 강렬한 감정을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되살려낸다. 사실보다 감정이 또렷한 기억. 첫사랑은 그래서 사실이라기보다, 마음이 만든 하나의 풍경이 된다.
로프터스에 따르면 감정적으로 강한 경험일수록 기억은 더 왜곡되기 쉽고, 더 잊히기 어렵다. 첫사랑은 그래서 미화되기도 하고 아련함으로 남기도 한다. 우리가 잊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나'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던 마음, 떨림, 봄의 감정. 첫사랑은 지나간 사랑이 아니라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감정의 초상이다.
첫사랑은 왜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까. 왜 지나간 한 사람의 얼굴이 삶의 구석구석에서 불쑥 떠오르는 걸까. 심리학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첫사랑은 개인적 추억을 넘어 인간의 정서 발달과 관계 형성에 중요한 자취를 남기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이 강렬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뇌가 감정을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강한 감정을 동반한 경험은 뇌의 편도체와 해마를 활성화해 기억을 더 깊이 각인시킨다. 설렘, 두려움, 기쁨, 상실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얽힌 첫사랑은 신경 연결망을 더 촘촘히 엮으며 지워지지 않는 장면으로 남는다. 첫사랑은 보통 청소년기에 찾아온다. 이 시기 뇌에서는 도파민이 활발히 분비되며 행복감과 함께 그 시절의 기억을 더 강하게 남기도록 만든다. 그래서 첫사랑은 시간이 흘러도 그때의 공기, 빛, 목소리마저 또렷이 되살아나는 특별한 기억이 된다.
독일 출생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의 ‘심리 사회적 발달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는 ‘친밀감’과 ‘고립감’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시기다. 첫사랑은 갈등의 정점에서 타인과 깊이 연결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우는 순간이다.
영국 정신분석학자 존 볼비(John Bowlby)의 ‘애착 이론’은 첫사랑의 방식이 어린 시절 애착 형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안정적인 애착을 가진 사람은 첫사랑에서도 쉽게 신뢰와 친밀감을 느끼지만, 회피형이나 불안형 애착을 가진 이들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나친 의존을 경험하기도 한다.
첫사랑의 방식은 훗날 관계 속에서도 반복되곤 한다. 첫사랑은 과거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후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청사진처럼 작용한다. 첫사랑이 따뜻하고 긍정적인 기억이었다면 그것은 이후에도 건강한 관계를 맺는 데 든든한 토대가 된다. 반대로 상처나 거절의 경험은 심리적 방어기제를 키우거나 관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은 아픔이나 미련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첫사랑은 나를 이해하게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게와 가능성을 처음으로 가르쳐준다. 첫사랑은 정체성 일부가 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적 각인’은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마음의 물결이 되어 지나간 시간을 내면에 살아 숨 쉬게 한다. 그것은 내가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을 꿈꾸었는지를 조용히 비추는 거울이 된다.
첫사랑이 남긴 흔적은 삶의 어느 구석에도 스며 있다. 그것은 정서적 성장의 시작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보이지 않는 나침반처럼 작용한다. 첫사랑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워야 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도 성장하고 있다는 조용한 증거가 된다. 과거의 따뜻한 빛 그리고 미래의 방향성은 모두 첫사랑의 시간 안에 담겨 있다. 기억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숨 쉬며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다정히 지켜보고 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소설과 영화 속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 순간의 강렬한 끌림을 경험한다. 단지 순간의 감정일까, 혹은 더 깊은 과학적이고 심리적인 이유가 있을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뇌, 본능, 심리가 정교하게 맞물려 빚어낸 아주 특별한 감정의 순간이다. 짧은 눈 맞춤만으로도 운명을 마주한 듯한 전율이 스며든다.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은 상대에 대한 친밀감을 빠르게 강화하고 아드레날린은 감정의 강도를 높여 사랑이라는 감정에 불을 지핀다.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다. 상대의 얼굴, 표정, 몸짓, 색감까지 순식간에 인지하고 그 안에서 수많은 정보를 추출한다. 대칭적인 얼굴, 따뜻한 눈빛, 자신감 있는 태도는 무의식 속에서 ‘좋은 짝’이라는 판단을 끌어낸다. 진화적으로 건강하고 생존력 있는 대상을 끌어안으려는 본능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가능케 한다.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이상적 연인’에 대한 심리적 도식을 갖고 있다. 어느 날, 그 스키마와 정확히 맞닿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날 때 감정은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 사람은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 사람이야.”
한마디가, 사랑을 시작하게 만든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상대에게 이상적 이미지를 투영할 때 더 강해진다. 현실의 상대보다 더 완벽한 사람으로 그려내고 환상에 빠지면서 짧은 시간에 강렬한 감정을 쌓아간다. 특별한 공간, 음악, 여행, 감각을 자극하는 환경에서 그것은 배가 된다. 배경 음악처럼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사랑이라는 착각은 어쩌면 현실보다 더 짙게 각인된다.
첫눈에 반한 사랑은 유사성과 친숙함 속에서 더 불꽃처럼 타오르기도 한다. 말투, 미소, 취향이 나와 닮았다고 느껴질 때 감정은 더 빠르게 마음속을 파고든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처음의 강렬함은 시간과 함께 식어갈 수도 있고 현실 속에서 이상과의 틈을 드러내기도 한다. 상대의 진짜 성격이나 가치관이 내 기대와 어긋날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깊이 알아가려는 마음과 관계를 가꿔나가려는 노력이다.
첫눈에 반한 감정은 부정할 필요 없다. 설렘은 인간이 지닌 아름다운 본능이며 삶의 찬란한 한순간이다. 꽃은 한순간에 피지만 열매는 천천히 익는다. 첫눈에 반한 사랑은 꽃이고 지속적인 사랑은 열매다. 당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다면 설렘을 마음껏 누리되 감정이 깊어지고 무르익기를 차분히 기다려보자.
첫사랑처럼 감정의 강도가 높은 경험은 기억 속에서 더 뚜렷하게 남고 때론 실제보다 더 아름답고 아련하게 재편된다. 첫사랑은 우리가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 배운 시절의 기록이다. 서툴렀지만 진심이었고 짧았지만 깊었기에 기억은 한 사람의 감정적 기준점이 되어 훗날의 사랑을 비교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첫사랑은 잊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내 마음의 일부로 남는 감정이다. 그때의 나, 그때의 떨림, 그때의 사랑을 기억하는 지금의 내가 조금 더 깊어진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랑은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