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던 딸
나는 딸 보다 아들이 귀한 집 외동딸이다. 집안으로는 첫 자손이자 장녀. 태어날 때부터 아들이 없어도 나는 아들처럼 자라왔다. 파란 이부자리에서 놀고 파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집안 내 첫 자손으로 사랑은 받았다. 그러나 곧 내 밑으로 큰아빠의 자식인 첫 장손이 태어나면서 나에 대한 사랑은 바로 교체되었다.
큰아빠의 생신날, 나는 선물로 유치원에서 배운 큰아빠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간 노래를 불렀다. 그날 엄마는 내가 큰아빠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로 큰아빠의 부인이란 사람에게 자식 잘못 가르쳤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채로 엄마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분하고 속상했던 엄마는 나에게 분풀이를 했다. 나는 그날 무엇을 잘못 한지도 모른 채 혼나고 얻어맞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오냐오냐 키운 큰아빠의 자식은 장난을 치며 작은 아빠들에게 대놓고 욕을 했다. 아무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던 고3 명절날, 집안 내 좋은 대학 첫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며 모두가 나에게 무거운 상처를 줬다. 그 뒤로 큰아빠가 와병을 10년간 앓다가 돌아가셨다. 큰엄마란 사람은 큰아빠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 아빠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아무도 없으니 도와달라고.
나는 차갑게 굳어가는 큰아빠를 붙잡고 슬퍼할 새도 없이 장례식장을 잡고, 모든 장례절차를 도맡았다. 사흘 밤을 꼬박 새웠다. 부의금함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문득 옆을 보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고 새신랑 격인 내 편이 조용히 어깨를 받쳐주며 나와 같이 졸고 있었다. 어제 출장 갔다 와 잠도 못 잔 신랑이 고마울 뿐이었다. 장지는 그 집 장손에게 결정하게 하고, 그렇게 난 큰아빠를 영영 묻고 왔다. 그 뒤로 난 그 집안을 찾지 않는다.
몇 년이 흐른 뒤, 나는 폐경련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남의 집 4대 독자를 낳았다.
아들은 될 수 없었지만, 귀한 아들을 낳은..
그게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