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많은 상실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수도 있고, 가까웠던 관계가 멀어지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커다란 상처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상실의 아픔을 느낄까요? 이 세상에 물질로 태어나기 이전에 영혼은 전체적인, 하나의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질세계로 찢겨 나오면서 이미 영혼에는 그 상실의 상처가 남아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함께 정말로 마음이 통한 다고 느낄 때,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기분을 느낄 때, 마음은 행복하고 편안함을 더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은 깊은 곳에서 누구나 빛을 바라고 있고 그 빛을 주고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빛이 누군가가 인정해 주는 듯한 기분 같은 명성이나 인기, 혹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자 해서 얻은 좋은 이미지 같은 것이라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공허함과 불안을 더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고 누군가가 내 마음이 어떤가를 눈치 채고 알아봐주고, 공감해주거나 보듬어주거나 인정해줄 때 마음속에 차오르는 깊은 감동도 실제로 겪는다면 누구나 즉각적으로 생생히 알아차릴 수 있는 매우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입니다.
타인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채워준다는 것은 사실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설사 부모라 할지라도, 가장 친한 친구나, 파트너, 영혼의 동반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영혼은 성장 과정에서 겪은 그만의 상처가 있고 그 상처는 서로가 가까워지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그 상처의 영향이 적다고 할지라도, 각각의 영혼이 가지고 태어난 사명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마음 전체를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이 스스로 어떤 일을 할 때 느낄 수 있는 채워짐과 만족감을 다른 영혼이 대신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는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는 이렇게 서로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이 다 부각되어서 서로에게 더 큰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서로가 그렇게 빛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 빛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는 상실은 그만큼 더 커다란 아픔을 동반합니다.
마음이 통하고, 내 존재를 받혀주고, 인정해주고, 내가 마음을 쏟고 표현할 수 있었고, 서로 함께 물리적인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고, 함께 있을 수 있었던 누군가를 갑자기 잃게 되는 것은 커다란 상처를 동반합니다. 그것은 죽음이나 물리적인 거리를 이별을 통한 것이 될 수도 있고, 관계의 단절, 관계의 틀어짐 등에 대한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관계의 틀어짐 등에 의해 벌어진 상실은 적지 않은 경우에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나아가서 자신에 대한 자책과 비난으로 이어지기도 쉽습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서, 내가 나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 사람이 떠나버린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떠나보내는 스스로가 너무나 싫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상실의 아픔은 나 자신을 굉장히 강력하게 공격하는 화살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오기도 합니다. 혹은 나를 버리고 떠난 상대방이 너무나 밉습니다. 그 사람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나의 자존심이 크게 다쳤습니다. 마음 가득히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깊은 분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상실의 슬픔입니다.
우선 상실은 누구에게나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헤어지고 아무렇지도 않으면 쿨 하고 더 멋진 것이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으면 더 좋거나 혹은 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혹은 펑펑 울어야 하는데 울지 않으면 더 차갑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면은 이러면 좋겠다는 내 생각과 동일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 내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느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느껴야 합니다. 내가 충격을 받은 상태인지, 의외로 생각보다 괜찮은 상태인지, 완전히 무너져서 나를 추스르기 힘든 상태인지를 바라보아야합니다. 상실을 겪은 이와의 관계와 그 안에 있었던 복잡한 감정에 따라서 마음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고, 마음의 상처가 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의 크고 작음이 나의 자존심이나 사람됨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습니다.
내면의 소리를 나 스스로 듣고 보듬는 것이 너무 큰 상처 속에 있으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변의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더 좋습니다. 나의 슬픈 마음에, 화나는 마음에, 아픔에 공감해주면서 그런 마음이 드는구나, 그래서 네가 힘들구나하고 적극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이 있다면 그러한 도움은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실의 아픔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아물지 않습니다. 하루에 뭘 해서 마음이 단숨에 좋아지는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날 수도 있지만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상처일수록 그 상처를 보듬고 풀어가고 쌓이고 막힌 에너지가 녹으면서 기운을 찾는 데는 더 큰 시간과 따뜻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누구를 돕거나 “사랑”해주고서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하니까 너는 이제 괜찮아.”같이 되지 않습니다. 그 상처받았던 마음 하나하나에 찾아가서 그 상처를 듣고 치유하기까지 그 마음들은 그 채로 얼어붙어서 거기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단번에 나아지지 않는다고, 나를 더 자책하거나 몰아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내가 좀 더 잘 생활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을 수는 있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를 조금 더 괴롭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실의 경험 자체가 아픔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고 그 다친 마음을 치유해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상처의 치유이지 상처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내버려 두는 일도, 상처를 낸 존재를 찾아서 복수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상처 자체가 아물지는 않습니다.
그 크나큰 아픔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공감하고 보듬는 것은 큰마음의 힘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상실의 과정 속에 있으면 그러한 마음의 힘을 내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정말로 고통스럽고 힘이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합니다. 억지로 그 힘이 들고 고통스러움 속에 있는 상태를 그렇지 않은 상태로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이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아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힘이 드는구나하고 그 마음을 조금씩 보듬어주어야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만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충분한 휴식일 수도 있고, 맛있는 음식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자연일 수도 있고,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등 좋아하는 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무기력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무기력 상태에서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아,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무기력 하구나, 내 마음이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드는구나 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필요한 것이 그러한 무기력과 휴식일 수도 있습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면의 소리를 듣고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마음이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 손가락을 베었는데 내일 완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벤 곳을 계속 누르고 만진다면 상처가 오히려 덧나기도 합니다. 손가락 상처조차도 회복에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마음도 기운을 차릴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음이라고 해서 의지로, 다그침으로 바뀔 수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시간을 주면서 조금씩 내면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상처를, 슬픔을 보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