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저, 저...
이규리/ 저, 저, 하는 사이에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이규리, <저, 저, 하는 사이에>, (시집『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지나고 보니 누군가는 분명 보고 있었고 알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속바지에 낀 스커트의 끝자락, 박음질이 다 보이게 뒤집어 입은 티셔츠, 머리끝에 달랑달랑 매달린 헤어롤. 그런 것 뿐 아니라 내 결혼생활의 위기까지도.
내 딴에는 티내지 않느라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새벽의 텅빈 눈동자, 한낮의 멍한 옆얼굴, 해질녘 무너진 뒷모습 같은.
한 때는 '왜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을까. 왜 다들 모른 척 한 거야.'하며
특정되지도 않는 누군가를 향해 원망의 마음을 품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자,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기 무서웠던 나의 방어기제였을 뿐이다.
내가 '저, 저...' 하며 망설여본 만큼
다른 이들도 나를 보며 '저, 저...' 했을 것이다.
분절음 하나에 불과한 저 말의 의미를 나는 안다.
큰 소리로 불러세워 말하고 싶은 욕구와, 못 본 척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픈 욕구 사이.
'정당한 관심'인지 '무례함의 극치'인지 고민하는 사이.
'그래봤자 남 일'과 '그래도 남 일 같지 않은'의 사이.
이 모든 사이에서 어느 한 쪽도 택하지 못해 터져나오는 탄식의 소리라는 것을.
어찌됐든 내가 스스로 발견하고 결심하고 행동을 취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면서 내내 '저, 저...' 하는 표정으로 내게 마음을 쏟고 있었던 몇몇 이들이 떠올라서.
더 내밀지도, 거둬들이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뻗은 손이 눈에 보이는 듯 해서.
'저, 저,' 이상의 말을 쉽게 건네지 않는 것, 하지만 오래 바라보며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것.
그것 역시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의 표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