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없었으므로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10살 딸아이가 내 책장에서 <눈사람 자살사건>이라고 쓰여진 시집을 꺼낸다.
많고 많은 시 중 <눈사람 자살 사건>만 찾아서 읽고는 말없이 제자리에 꽂아놓는다.
"무슨 생각이 들어?"
"몰라. 이상해."
눈사람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자기 마음을 모르겠어서, 자기 마음도 모르겠어서, 그래서 누구보다 이상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삶. 죽음에도 삶에도 별 의미가 없는 삶. 눈사람은 자신의 삶이 그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왠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다가 문득,
그동안 나는 살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만 진짜로 죽으려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을 청하려 어렵게 눈을 감는 순간까지, 수십번도 더 '아 너무 살기 싫다' 생각한 날조차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절 나의 '살기 싫다'는 '죽고 싶다'의 동의어가 아니라 '이렇게 살기 싫다'의 줄임말이었음을. 이제야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텅 빈 욕조에 홀로 앉아 투명한 물이 되어 사라질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오래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던 자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뭉뚱그려 뜨신 물에 풀어놓으며,
이제는 어쩔 수 없겠구나 마침내 눈을 감으며,
눈사람은 아팠을까. 홀가분했을까.
아니 진짜로 죽으려고 한 건 맞을까.
아니 진짜로 죽으려고 했더라도,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던 건 아닐까. 누군가를.
한 때 사랑한 누군가를. 아니면 전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어쨌든 누군가를.
무럭무럭 피어나는 김을 보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겨우 남은 눈조각 하나를 조심스레 건져올리며
'눈사람씨, 괜찮아요? 힘드셨군요. 이렇게 살긴 싫으셨군요.' 하고 자신의 남은 흔적 위로 한방울 눈물을 떨궈줄 누군가를.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발견된 눈사람은 곧장 하수구로 흘러내려가지는 않았으며,
남은 눈사람들은 새하얀 사기그릇에 욕조 물을 한사발 퍼놓고 눈밭에 모여 그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미안해했고,
어떤 이는 흐르는 눈물에 자신이 녹아가는 줄도 모르고 오래도록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