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도 캥거루가
최정례/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TV에서 캥거루가 권투를 하는 걸 보았어요
사람이 오른손으로 치면
캥거루도 오른손을 뻗어 치고
왼손을 뻗으면 다시 왼손으로 받아치고
치고 받고 치고 받고
사람이나 캥거루나 구별이 안 되더라구요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 중 느닷없이
캥거루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앞발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나는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캥거루 주머니에 빗물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지요
한번은 또 TV에서
캥거루가 바다에 빠진 새끼를 구하려다
물속으로 따라가 빠져 죽는 장면을 보여주더라구요
그 주머니를 채운 물의 무게와
새끼의 무게를 가늠하다가
꿈에서는 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지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한밤에 이렇듯 캥거루 습격을 당하고 나면
영 잠이 안 오지요
이따금
캥거루는 땅바닥에 구멍을 판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그 구멍으로 아무것도 안 한다네요
나도 쓸데없이 구멍을 파고
아무것도 안 하게 되네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최정례,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문학과지성사, 2011)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변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계기는
뭐니뭐니 해도 제 새끼의 탄생이 아닐까.
한번 되고나면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이름.
죽을 때까지 끝나지도 않는 과업.
엄마.
올해로 엄마된 지 꼭 10년.
인생의 4분의 1을 엄마로 살았을 뿐인데,
그 앞의 4분의 3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것 같다.
아니면 단지 엄마로 살기 위한 준비과정이었거나.
내 생활은 아이들로 가득 차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모든 삶이 그러하듯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미울 때도 있고 예쁠 때도 있다.
다만 정말로 가득 차 있다.
때론 넘치고 흐를만큼 너무 가득 차서 위태로울 정도로.
'휴休' 없는 휴일이 많았던 한 주.
나는 완전히 지쳐서 그만하고 싶었다.
반은 웃고 반은 우는 얼굴로 쉬는 날이 더 힘들다 했더니 누군가 그랬다.
"잠깐이야. 몇 년만 지나면 휴일마다 혼자 남겨지게 될 걸."
하지만 그 '누군가'도 누군가의 '엄마'.
다 큰 자식의 전화 한 통에 얼굴색이 변하고
치솟는 물가에, 변덕스런 날씨에, 애들 살아갈 날을 걱정하는 한마리 어미캥거루.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선생님. 혼자 남겨지게 되는 것과 혼자인 것은 다르잖아요.
우리는 결코 완전한 혼자가 될 수 없잖아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나인데,
이게 안되잖아요.
당신도 나도 캥거루도 모두 새끼를 낳고 들쳐메고 숨차게 살아온 어미들인데.
결정적인 순간, 그 사실이 언제나 삶의 모든 것의 앞에 와버리는데.
그리고 그 날이었나, 그 다음날이었나.
한밤중에 내가 아는 가장 강한 캥거루의 전화를 받았다.
"뭐하노? 별일없나? 애들은 자나?"
"어. 그냥 뭐. 쉬는 날이라 쉬었지. 애들은 자고, 나는 그냥 있다."
새삼스레.
'아 참, 나도 어떤 캥거루를 잠 못들게 하는 자식이었지' 깨닫고서
그날 밤은 오래도록 구멍을 팠다. 쓸데없이.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깊어진 구멍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자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