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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09. 2024

쓸쓸해지는 계절

문정희/ 쓸쓸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글씨로 써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 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문정희, <쓸쓸>, (시집 『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춥다. 감기에 걸렸다.

며칠전부턴 집에서도 긴바지 긴팔 옷을 입고 밤에는 보일러도 잠깐 튼다.

더워 더워 하던 게 엊그제라, 이정도 날씨에도 추워하는 내가 참 간사하게 느껴진다.

여섯시즈음부터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저녁준비를 하다가 문득

쓸쓸해진다.


호르몬 때문이라 했다.

행복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세라토닌이란 호르몬은 햇빛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져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무렵부터 무력감과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 즉 '가을탄다' 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라 했다.

아아 그렇구나, 하다가 문득

그래서 쓸쓸해진다.


하지만 과학적인 분석은 아아 그렇구나로 끝날 뿐 아무것도 달래주지 못한다.

그래서 시詩가 태어난다.

그러나 시마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그저 쓸쓸.

이 쓸쓸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사랑뿐일테지만

이제는 시 속에서나 존재하는 사랑.

밤마다 사랑없는 이불 속을 파고드는 일이

얼마나 지겹고도 쓸쓸한 일인지 당신은 알까.

 

앞으로 더 추워질 일만 남았는데, 낮은 더 짧아질텐데.

내 쓸쓸은 얼마나 더 힘이 세질까.


아아, 쓱쓱 쓸어내버리고픈 쓸쓸.

모양도 소리도 참 쓸쓸한 쓸쓸.

쓸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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