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서시>,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원래 올리려던 시를 넣어두고, 내가 좋아하는 한강의 <서시>를 올려본다. 이것도 운명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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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언제 이렇게 '문학'이 화제였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은 처음인 것 같다.
연예인이나 정치가가 아닌 한 여성소설가의 얼굴이 신문의 1면을 대문짝만하게 차지하고.
사람들은 온통 문학 얘기를 하고.
SNS창을 열면 어김없이 한강, 저마다의 한강에 대하여 한마디씩 하느라 바쁘다.
모두들 지금껏 저 좋은 작품들, 저 좋은 작가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싶다.
하루 아침에 세상이 바뀐 것 같았다.
물론 내 세상은 손톱만큼도 변하지 않았지만,
세상이 워낙 들썩들썩하니 내 마음도 왠지 좀 부풀어오르는 듯 했다.
나도 좋아하는 작가니까.
나도 정말 좋아하니까.
하지만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왠지 모르게 가슴끝이 찔리는 느낌이었다.
읽다가 읽다가 내려놓은 소설 <흰>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채식주의자>는 읽은 지가 오래되어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가히 충격적이었던 <소년이 온다>와, 춥고 아름답고 아팠던 <작별하지 않는다>
내가 읽었고 기억하는 작품들은 이게 다였다.
'멋있다, 대단하다' 말고 내가 뭐라고 감상을 남길 자격은 없을 것 같아 조용히. 그저 약간 둥둥 뜬 마음으로 오전을 보냈다.
한강 작가의 수상소식이 발표된 후
반나절만에 13만부의 책이 팔려나갔다고 했다.
오후에는 그 기사를 보고 좀 코미디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강의 책들은 그사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금테처럼 두르고 새로 만들어졌다.
출판사며 서점들은 이처럼 확실한 마케팅이 있을까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집에 있는 한강의 책들을 줄지워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올리는 사람들.
그동안 자신이 했던 한강과 그의 작품에 대한 말들을 열심히 끄집어내 도취되는 사람들.
그러는 동안 내 머릿속엔 누군가 한강의 작품들을 두고 페미니즘이니 뭐니, 대중적이지 않니 어쩌니, 교육적으로 좋지 않고 어쩌고, 했던 말들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였고 분명 존재했던 사실이었지만 그런 건 몇 시간만에 싹 사라졌다.
모든 것은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 속에 다 없던 일이 되었다.
그야말로 재미있는 현상이었다.
어떤 타이틀, 수상, 1등, '그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그것에만 주목하는 세상.
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이 '문학'이라고 다를까.
그걸 눈앞에서 확인하는 사이 부풀어올랐던 마음이 푹 하고 꺼졌다.
물론 한강 작가님은 대단하다. 멋있다.
우리나라 최초, 그리고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이 정말로 더없이 자랑스럽다.
내용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그의 작품을 접할 때마다 느껴지던 충격은 생생하고,
'한강은 진짜 천재같다' 라고 적어놓은 내 일기 속 기록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상을 받지 않아도, 그 어떤 타이틀을 거머쥐지 못해도, 울림과 감동을 주는 작가와 작품들이 정말로 많이 있다.
그리고 문학작품 이란 것은 독자에게 지극히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거라, 어떤 객관적인 업적을 남기는 분야와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경숙이, 어떤 사람에게는 박완서가 한강보다 더 감동일 수 있다.
나는 그냥 그런 게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 어떤 타이틀 때문에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운명적인 끌림에 의해 자신만의 문학작품, 자신만의 작가를 만나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