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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20. 2024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최영미/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최대한 몸을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에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히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며

특히 시는 절대로 쓰지도 읽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최영미, <행복론>,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사, 1998


-

오랜만에 마스다 미리의 책을 꺼내읽었다.

몇 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내가 몇 살 더 어렸는데, 어느새 주인공 미나코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마흔. 안정적인 결혼생활과 -성실한 남편과 귀여운 딸과 주택이 있는-, 돈벌이를 위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주부의 삶.

남들이 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미나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며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질문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미나코의 주변사람들은 모두 미나코가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미나코는 그것이 자신을 타이르는 같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나를 타이르고, 이정도면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달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계시잖아. 귀여운 딸이 둘이나 있잖아. 내 집은 아니지만 이렇게 번듯한 집에서 따뜻한 물 펑펑 쓰며 살 수 있잖아. 매달 따박따박 월급 들어오잖아. 밥굶을 걱정을 한 적도 없잖아. 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없고. 이정도면 됐어. 뭘 더 바라...

처한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만(오히려 나는 종종 마나코의 삶을 부러워하는 쪽이지만), 그럼에도 마나코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걸 찾기 시작하면 그나마 가진 것들도 추스르지 못할 것 같아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하지 말아야,

나를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야,

그렇게 살아야 살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나코의 딸 리나가 "엄마가 지금 제일 원하는 건 뭐야?"라고 물었을 때,

미나코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엄마는 존재감을 원해."라고 말하고.

존재감. 그 말에 왠지 내 목구멍이 쎄하게 아파왔다.


존재감이란 뭘까. 행복이란 뭘까.

최영미의 <행복론>을 여러번 들여다본다.

아침엔 해가 나고 저녁엔 비가 오고

종일 바람이 불고.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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