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최영미/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최대한 몸을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에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히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며
특히 시는 절대로 쓰지도 읽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최영미, <행복론>, 『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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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마스다 미리의 책을 꺼내읽었다.
몇 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내가 몇 살 더 어렸는데, 어느새 주인공 미나코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마흔. 안정적인 결혼생활과 -성실한 남편과 귀여운 딸과 주택이 있는-, 돈벌이를 위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주부의 삶.
남들이 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미나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며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질문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미나코의 주변사람들은 모두 미나코가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미나코는 그것이 자신을 타이르는 것 같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나를 타이르고, 이정도면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달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계시잖아. 귀여운 딸이 둘이나 있잖아. 내 집은 아니지만 이렇게 번듯한 집에서 따뜻한 물 펑펑 쓰며 살 수 있잖아. 매달 따박따박 월급 들어오잖아. 밥굶을 걱정을 한 적도 없잖아. 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없고. 이정도면 됐어. 뭘 더 바라...
처한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만(오히려 나는 종종 마나코의 삶을 부러워하는 쪽이지만), 그럼에도 마나코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걸 찾기 시작하면 그나마 가진 것들도 추스르지 못할 것 같아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하지 말아야,
나를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야,
그렇게 살아야 살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나코의 딸 리나가 "엄마가 지금 제일 원하는 건 뭐야?"라고 물었을 때,
미나코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엄마는 존재감을 원해."라고 말하고.
존재감. 그 말에 왠지 내 목구멍이 쎄하게 아파왔다.
존재감이란 뭘까. 행복이란 뭘까.
최영미의 <행복론>을 여러번 들여다본다.
아침엔 해가 나고 저녁엔 비가 오고
종일 바람이 불고.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