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이상국, <혜화역 4번 출구>, 시집 『뿔을 적시며』, 창비, 2012
내일은 아빠의 생신이다. 아니 다음주 언제라고 했는데 주말인 내일 식구들이 모여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빠는 생신을 음력으로 지낸다. 매년 날짜가 바뀌기 때문에, 나는 언니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빠의 생신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것이다. 해마다 내년에는 꼭 기억해야지 하는데도 매번 잊어버린다. 사실 우리 가족은 명절이고 생신이고 다같이 모여 밥을 먹을 때마다 아슬아슬하고 불안하다. 그래도 장성한 자식의 도리로 생신때면 식사를 한끼 대접해 드리고, 아이들을 핑계로 케이크에 초를 꽂아 노래도 부르고, 예의상 용돈도 조금 챙겨드린다. 진심을 담아 축하드린다기보다는 그저 숙제처럼,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마음이다.
아빠의 생신이라도, 나는 아빠와 연락하지 않는다. 아빠와 나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아빠가 내게 길을 물어오는 낯선 아저씨보다 더 불편하다. 그게 늘 죄송하고 죄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지가 않는다. 차가 쌩쌩 내달리는 8차선 도로가 아빠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도저히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아 저 멀리 차들 사이로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아빠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아빠가 엄마보다 더 오래 살까봐 두렵다. 앙상하게 늙어가는 아빠가 불쌍하고도 답답하다. 아빠가 알면 서운해 하실까. 아니 아빠는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에게도 내가 그런, 숙제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나는 아빠와 잘 지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이상하고도 부럽다.
올해 초, 죽었는지 살았는지 기별도 없이 사라졌던 전남편에게서 4년만에 연락이 왔을 때, 그리고 아이들이 아빠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이제 내 삶, 아니 아이들 삶에 큰 변화가 있을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었다. 죽었거나 사라져서 세상에 없는 줄 알았던 제 아빠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다정하게 바라봐주고 안부를 물어준다는 게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일지, 나는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물론 나는 불편했지만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다행스러웠다. 내가 아이들에게서 아빠를 빼앗았다는, 그리고 전남편에게서 아이들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에서 좀 놓여날 수도 있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내 아이들을 그리워했다는 전남편의 마음이 진심이기를, 그래서 아이들과 그의 관계가 조금씩 좋아지기를 바랐다.
그렇게 봄에 세 번을 만나고, 다시 연락이 끊겼다. 그는 왜 노력하지 않는 걸까... 요즘 내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이다. 처음엔 종종 큰아이에게 문자나 전화로 따로 연락을 하는 것 같더니 점점 빈도가 뜸해졌고, 어느덧 아무 연락이 없은 지 두 달이 지났다. 애들 아빠가 아이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는 '더우니 잘 지내고 좀 선선해지면 보자'였다. 어느 부모가 덥다고 아이들을 만나지 않는지.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는 걸 고려한다 해도 화가 났다. 나였다면, 그동안 같이 보내지 못한 여름이 맺혀서라도 기다렸다는 듯 물놀이도 같이 가고 수박과 아이스크림도 나눠먹고 했을 것 같은데, 더위가 만나지 못할 이유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9월이 되고 10월이 되어도 연락은 없었다. 선선해지다 못해 서늘해졌던 어느 저녁, 큰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전에 가을되면 만나자고 했는데 왜 연락이 없지?" 나는 아이에게 "그러게. 보고싶으면 너가 먼저 연락해봐. 괜찮아." 라고 말해주었는데, 아이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사레를 치며 "아, 아니야 아니야." 했다. 그 모습에 내 마음이 뭔가에 쥐어뜯기는 것처럼 아팠다.
이런 식으로 할 거 왜 다시 만나자고 해서 애들을 헷갈리게 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다시 연락이 끊긴 것에 안도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겁이 난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진짜로 겁이 난다. 나는 겁쟁이고, 애들아빠 못지 않게 비겁한 엄마다. 여전히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엄마라는 게 화가 난다.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그렇게 보고싶고 그리웠다는 아이들이, 만나보니 더이상 그 때의 아이들이 아니어서 실망했을까? 4년이란 시간을 좁히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아니면 단지 바빠서? 일신상의 어떤 문제가 생겨서? 양육비를 다시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처음엔 연락이 뜸해질 때마다 양육비가 곧 끊기겠거니 생각했는데, 양육비는 8개월째 제 날짜에 입금되고 있다. 그래서 더 속을 모르겠다. 아이들의 마음도 모르겠고. 나는 나대로 또다른 실망감과 혼란을 느끼고 있다. 나는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바보같이.
아빠. 아빠. 아빠라는 단어는 내겐 너무 아프다. 실제로 아이들이 어릴 때, 아파 아파 하는 걸 잘못 듣고 아빠를 찾는 건 줄 알고 혼자 운 적도 많았다.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아빠란 존재는 멀고, 아프다.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허전하고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는 부정(父情)이 그립다.
(<혜화역 4번 출구>읽고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게도 저런 아버지가 있었으면. 우리 딸들에게도 저런 아버지가 있었으면. 나도 내 딸들도 '아빠 잘 가' 하며 아버지를 안아줄 수 있는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 아빠. 아버지. 아버지. 아무리 불러도 채워지지 않는. 아빠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