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 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이운진, <슬픈 환생>,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천년의 시작, 2015
오늘은 공원에서 유난히 개를 많이 보았다.
뛰고 걷고 냄새맡고 짖고 매달리고 돌고, 행복해 보이는 개들.
덕분에 개를 정말로 좋아하는 우리 딸들도 내내 행복한 표정이었다.
큰 딸은 제대로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일 년에 200번쯤 "엄마, 우리도 강아지 키우면 안 돼?" 한다.
오늘도 몇 번 그러더니 나중에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다시 태어나면 개로 태어날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그거 좋네. 엄마도 사랑받는 개로 태어나면 좋겠다." 했다.
사랑받는 개.
올초였나, 티비 다큐멘터리에서 개의 환생을 믿는 몽골인이 십몇년간 함께 한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반려견이 죽을 때 많이 슬퍼하면 안되요."라고 말하면서 누구보다 슬퍼하던 남자.
남자는 사람들이 죽은 개를 밟지 못하도록, 그리고 신과 가까워지라는 의미에서 개를 아주 높은 지대까지 안고가서 묻었다. 가는 길에 배고프지 말라고 쌀과 우유를 뿌리고, 부유하게 태어나길 바라며 입에 버터를 넣어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꼬리를 잘라 개의 머리 맡에 두었다. 더이상 개가 아니라는 뜻이라 했다. "좋은 사람으로 세상에 빨리 돌아와."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하얀 눈밭 위로 눈물을 쏟았다.
한 번도 개를 키워본 적 없는 나도 남자를 따라 울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사실 개가 개여서 힘들었는지, 행복했는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다 사람 기준, 자기 기준에서 생각할 뿐이다.
지금 내 기준에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하는 것은 거의 저주나 다름없는데,
나를 울린 것은 사람으로의 환생을 비는 그 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이었다.
존중을 담은 마음. 진심으로 개의 명복을 비는 마음.
죽은 몸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며 전하는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 말이다.
내가 만일 저런 눈물과 기도 속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런 생이라도 차마 원망하지 못하리, 되려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리 생각하며,
'아아. 그것보단 차라리 이 생을, 전생의 어떤 잘못으로 인해 사람이 되는 벌을 받은 것이라 여기는 게 낫겠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몽골의 초원을 달리는 개는 나보다 자유로웠을 것이다.
떠오르고 지는 태양과 시시각각 색을 바꾸는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개는 나보다 행복했을 것이다.
쏟아질듯 반짝이는 은하수 아래 잠드는 개는 시린 눈밭에서도 나보다 따뜻한 밤을 보냈을 것이다.
네 개의 눈으로 어둠과 맹수로부터 가축과 가족을 지키는 개는 나보다 훨씬 쓸모있었을 것이다.
나의, 이 생의 끝엔 누가 있을까.
누가 어떤 기도를 하며 내 꼬리를 잘라줄까.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꼭 그래야 한다면 나는 사람보다는 몽골의 개가 되고 싶다.
추위를 잘 견디는, 너른 초원을 내달리는, 지켜야 할 것은 끝까지 지키는, 크고 강인하고 용맹한 개가.
그리고 끝까지 사랑받는 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