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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Nov 20. 2024

내 딸들이 엄마가 될 즈음엔

김승희/ 엄마의 발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려 문드러진 전족의

기형의 발


신발 속에선 다섯 발가락

아니 열 개의 발가락들이

도화선처럼 불꽃을 튕기며

아파아파 울고

부엉부엉 후진국처럼 짓밟히어

평생을 몸살로 시름시름 앓고


엄마의 신발 속엔

우주에서 길을 잃은

하얀 야생 별들의 신기한 날개들이

감옥 창살처럼 종신수에 갇히어

창백하게 매마른 쇠스랑 꽃 몇 포기를

조화처럼

우두커니 걸어놓고 있으니


딸아, 보아라.

가고 싶었던 길과

가보지 못했던 길들과

잊을 수 없는 꿈들이

오늘 밤 꿈에도 분명 살아있어

인두로 다리미로 오늘밤에도 정녕

떠도는 길들을 꿈속에서 꾹꾹 다림질해 주어야 하느니

네 키가 점점 커지면서

그림자도 점점 커지는 것처럼

그것은 점점 커지는 슬픔의 입구,


세상의 딸들은

하늘을 박차는 날개를 가졌으나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날지를 못하는구나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



김승희, <엄마의 발>, 『달걀 속의 生』, 답게, 2007



엄마가 되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다고들 한다.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존경이나 위대함 같은 걸 새삼 깨달은 건 아니다.

엄마인 여자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분노가 일었다.

이유없이 먹먹하니 가슴이 아프다가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아기도, 세상도, 가족도, 내 몸과 마음도, 그냥 모든 게 다 너무했다.

 

엄마가 되고 나니 (내 엄마를 포함해) 되려 더 이해할 수 없는 엄마들이 많았다.  

엄마가 되고 나니 나라는 존재는 타인처럼 낯설어졌고,

나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했던, 엄마가 된 나를 더욱 사랑하겠다 약속했던 남자는 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엄마의 행복이라는 것은 허상이거나 환상이거나 찰나,

아니면 누군가의 거짓말이었단 걸 깨달았다.

개인의 행복, 사람의 인생 보편화될 수 없듯, 엄마의 삶 역시 보편화할 수 없는 것인데,

엄마가 되는 순간 감정도 삶도 어떤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만 같았다.

다분히 의도된 틀. 강한 전류가 흐르는 틀. 거기서 벗어나면 엄마로서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틀이었다.


엄마가 된 후에, 삶은 너무하다 싶게 급격히 무게를 늘리고.

엄마되기 이전의 나는 가장 아래로, 가장 어두운 신발 속으로 제 모습을 구깃구깃 감추고.

나는 감당할 수 없이 무거워진 다리를 질질 끌면서.

행여나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어버릴까, 혹여나 포기하고 싶어질까,

그래도 살아야지, 어떻게든 새끼들은 키워야지, 이제는 엄마로서 나아가야지,

하루에도 수십수백번 마음을 다잡으며 여러 달과 여러 해를 넘겼다.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퉁퉁 부어버린 내 발가락들, 아파아파 나갈래 고통을 호소하며 꿈틀대던 그 발가락들은

이제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포기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고, 사는 것에 너무 지쳐버린 나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일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딸들이 짐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런 시에 기대고 이런 글을 쓸 때마다 행여라도 딸들이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한다.

사랑하는 내 딸들이 훗날, 우리 엄마는 왜 '다시 태어나도 너희들의 엄마가 될래. 너희는 내 삶의 가장 큰 선물이야. 너희의 엄마로 살아서 더없이 행복했어.'라는 류의 글 남겨놓지 않았을까, 왜 자꾸 힘들다 어렵다고만 했을까, 서운해 할까봐 걱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딸들 탓이 아니다. 나는 내 딸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말이 뭔지 나는 안다. 딸들로 인해, 내가  엄마가 되었기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결코 내가 엄마로 산 것을 후회한다거나 딸들을 덜 사랑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다.


하필 나는 딸만 낳아서, 딸들이 나중에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나처럼 제 자식을 낳고,

나처럼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슴이 아린다. 

내 엄마도 아마 그래서, 엄마가 된 나를 마음껏 축하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 엄마의 굳은 얼굴을 이제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내 딸들이 그런 식으로 나를 이해하게 되길 바라진 않는다.

평생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좋으니, 부디 내 딸들이 엄마가 될 즈음엔 많은 것이 바뀌길 바란다.

'엄마'라는 단어 안에 내포된 폭력적인 억압과 틀이 모두 깨어지길 바란다.

엄마가 된 후 달라지는 것들, 잃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을 누구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라는 이유로 외로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로 살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라서 대충 타협하며 얼버무리다 입을 닫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이므로 더욱 사랑받고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엄마의 발로도 못 갈 곳이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세상에 내 딸들이 엄마가 되어 제 자식을 품에 안고.  나를 향해 "엄마는 무슨 엄살을 그리 피웠대?" 하며 핀잔을 주면, 나는 살짝 눈을 흘기며,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딸들을 꼭 안아줄 것이다. 그  나도 더없이 행복한 엄마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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