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천천히 가요."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린다.
그 팔을 끌어당기면서
아침부터 나는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친다.
기다림을, 참으라는 것을 가르친다.
"자, 착하지? 조금만 가면 돼.
이따 저녁에 만나려면 가서 잘 놀아야지."
마음이 급한 내 팔에 끌려올 때마다
아이의 팔이 조금씩 늘어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모질게도 가르치려는 것일까.
해종일 잘 견디어야 저녁이 온다고,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섞을 수 있다고
모든 아침은 우리에게 말한다.
오늘은 저도 발꿈치가 아픈지
막무가내로 울면서 절름거린다
"자, 착하지?"
아이의 눈가를 훔쳐주다가
나는 문득 이 눈부신 햇살을 버리고 싶다.
나희덕, <저녁을 위하여>,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1994
너무 많은 기운을 일터에서 빼앗기고 돌아온다.
돌아온 집에도, 없는 힘을 쥐어짜내 해야 할 일들이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다.
" 잠깐만, 기다려, 알았어, 조금만."
저녁내내 이 말만 반복하며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넌다.
그동안 둘째는 나와 다리찢기 게임을 하려고 기다리고,
첫째는 나와 피아노 연탄곡을 치고 싶다고 기다린다.
마지못해 한번씩 해주고는 "이제 늦었으니까 씻고 자야지. 내일하자." 한다.
내일은 아무도 아무것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러는 것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니 그러려니 한다.
내일은 또 내일의 일로 아침부터 바쁘겠지.
첫째도 둘째도 돌이 되기 전에 어린이집에 보냈다.
육아휴직 3년이 보장되어 있는 직업이지만 겨우 몇십만원의 수당조차 나오지 않는 휴직은 의미가 없었다.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 있어야 했고 내게 돈을 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내가 돈을 벌려면 아이는 남이 키워줘야 했다.
매일 아침 7시 45분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면서 나는 내가 대단하고도 끔찍했다.
매일 오후 5시 10분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서 나는 내 하루가 뿌듯하고도 비참했다.
아이들은.
아이들은 자주 울고 내내 아팠다.
그것이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힘듦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은 이제 끝이 났고 그 때에 비하면 모든 것이 나아졌는데.
몸과 마음이 여전히 바쁜 것은, 지치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다 내 탓일 테지.
언제 놓여날 수 있을까.
일어나, 착하지, 어서, 조금만 서둘러, 가자 가자, 이런 말들에서.
피곤해, 미안해, 이런 마음에서.
오늘은 해가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아이들 사이, 이불 속을 비집고 들어가 눕고 싶다.
자비도 연민도 없이 때맞춰 찾아오는 아침이 때론 너무 야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