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오전
낯선 골목길 담장 아래를 걷다가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는 순간
내가 저 꽃나무였고
꽃나무가 나였던 것 같은 생각
화들짝 놀라 꽃나무 바라보는 순간
짧게 내가 기억나려던 순간
아, 햇빛은 어느새 비밀을 잠그며 꽃잎 속으로 스며들고
까마득하게 내 생은 잊어버렸네
낯선 담장집 문틈으로
기우뚱
머뭇거리는 구름 머나 먼 하늘
언젠가 한 번 와 본 것 같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고요한 골목길
문득 바라보니 문득 피었다 사라져버린 꽃잎처럼
햇빛 눈부신 봄날, 문득 지나가는
또 한 생이여
권대웅, <삶을 문득이라 부르자>,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 때』 , 문학동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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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라는 말을 좋아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리저리 둘러대지 않아도 되잖아.
'몰라, 그냥, 어쩌다보니, 불현듯, 갑자기' 뭐 그런 말들이랑 비슷한데.
그것만큼 가볍지는 않고, 좀 더 가슴을 누르는 느낌이랄까.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면 모든 게 다 문득 벌어진 일인 것만 같아.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한 것들은 잘 떠오르지도 않아.
가끔은 그게 슬퍼. 막 사랑했던 것도, 막 분노했던 것도,
좋아서든 싫어서든 막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았던 것도,
가라앉고 나면 남는 건 '문득' 뿐이거든.
그걸 느끼는 순간 내 몸 어딘가에 뻥 구멍이 나.
구멍이 하나, 둘, 셋... 그러다 마침내는 텅 비어버리겠지.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몰라. 문득 돌아보니 그렇게 되어있었어.
잘 한 건지 잘 못 한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알아도 모르겠어. 모르고 살고 싶어.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언제까지 이렇게.
문득문득 떠올리고 후회하고 아프고 그래야 할까.
살아온 만큼 더 살면, 그러니까 한 80살쯤 되면.
생이 하나의 알맹이로 보이면 좋겠어.
자잘한 건 다 털어내고, 치매걸린 것 마냥 다 잊어버리고.
어느날 문득 작은 알맹이 하나 손바닥에 얹어놓고
됐다, 됐어, 이정도면 애썼다,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고 난 후 문득 뒤돌아보면
어느새 아무데도 없는 나.
그래, 나는 가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