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만 해보았어요. 당신과의 캠핑을.
박상수/ 리폼 캠핑
죽은 나뭇가지를 한가득 모아왔어 불속에 넣으며, 솔방울과 자작나무 껍질도 가끔 넣어주면서, 마시멜로는 가져왔지? 모닥불 깊은 곳엔 고구마를 굽고 있어 단내를 풍기며 익어가는 소리, 응, 우린 눈 내리는 숲속에 있지 서로에게 덧신을 신겨주고, 양털 패딩도 입혀주었지 불꽃과 우리, 드문드문 눈꽃과 우리, 넌 어떤 사람이 될 것 같아? 얼음처럼 단단한 사람, 사라질 땐 흔적도 안 남기는 사람, 그럼 넌? 고양이 발바닥 젤리 같은 사람, 어딜 걸어도 안 다치는 그런 사람, 그렇게 믿어야 겨우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세상, 갖고 싶은 건? 마당이 좋아 네가 눈 밟는 소리를 십 분은 눈 감고 들을 수 있는 마당, 그럼 넌? 난 옥상이 좋지 맨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나무 테크랑 언제든 텐트 칠 수 있는, 버려진 큰 화분들이 놓인 그런 옥상, 그릴 위에선 양배추 크림스튜가 끓고, 우유랑 생크림이랑 치즈스톡을 넣고 살짝 더 끓이다가, 법랑 컵에 담아내지 괜찮아 장갑이 두툼하니까, 호호 불다가 멍하다가, 밤하늘을 올려보다가, 아무 말도 안하다가 다시 생각난 듯 늦게 먹어도 좋지, 잘라둔 식빵을 담가 먹어도 좋고, 눈은 , 어쩌면 눈은 더 올 것 같아 트레일러도 캠핑카도 모두 잠들고, 낼 아침이면 생수통도 뚱뚱하게 얼겠지 모닥불이 꺼지면 우린 밤새 텐트 속에 있을거야 헤드 랜턴을 켠 채 서로에게 편지를 적어주고, 이따금 문을 열어 대기에 가득한 눈송이 냄새를 맡을 거지, 밤새도록 문패도 만들고 네가 가져온 수제 캔들도 밝혀둘거지, 큰불 대신 작은 불을 건드리며 손가락끼리 노닥일 거지. 모닥불에서 꺼내온 넓적 돌은 수건으로 돌돌 말아 같이 껴안기로 하자. 먼저 잠든 사람을 들여보다가. 그 속눈썹에 살살 입김을 불어보기도 하지. 이마에 닿은 물방울에 놀라 텐트 문을 열면 아침에는 세상이 바뀌어 있겠지 신발은 사라지고 긴 발자국이 멀리 숲속까지 이어져 있을 때, 저 멀리서 작은 눈사람이 입김을 쏟으며 돌아올때,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면 나는 그만 문을 닫고 살짝 울고 말 거지.
박상수, <리폼 캠핑>, 『오늘 같이 있어』, 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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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많이 생각해주는 어떤 사람과 37일만에 다시 만났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직장 이야기, 육아 이야기, 제주도 이야기, 전쟁 이야기, 한강 이야기, 티비 이야기, 건강 이야기, 카페 이야기, 물가 이야기.
공통으로 알고 있는 다른 사람, 공통으로 알고 있는 지나간 시절, 공통으로 알고 있는 몇몇 장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캠핑 이야기.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버렸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나는 나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다.
물어만 준다면 죄다 꺼내놓을 작정이었는데,
오늘도 그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아픈 상처를 들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떤 상처는 누군가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주고 후후 불어주는 것만으로 치유되기도 하는데.
그 사람은 빨갛게 피가 배어나오는 부분만 쏙 빼놓고, 그 주위로 빙글빙글 연고를 발라주었다.
거기가 아닌데.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듣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그 사람과 마주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번 왜 그럴까.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어떤 한 사람을 궁금해한 죄밖에 없는데.
나같은 사람은 당신같은 사람을 마주하면 안되는 건가. 그것도 죄인가.
시월같지 않게 더운 날, 마음엔 이미 마른 낙엽이 떨어져 버석버석 밟혔다.
버석버석.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우연히 트렁크에 캠핑짐을 싣고 있는 연인과, 그들 옆에 붙어있던 새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다.
늦가을의 캠핑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사람이 생각났다.
듣는 동안에는 별 생각 없었던 이야기였는데.
같이 캠핑을 떠나면 어떨까.
미역국을 데우려 가스불을 켜놓고 내내 그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겠지.)
추운 날 같이 캠핑을 떠나면 따뜻할 거야.
모닥불을 피워놓으면 마침내 우린 서로에 대해 충분히 묻고 오래 말할 수 있을 거야.
방바닥을 닦으며 내내 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돼.)
자꾸만 가본 적도 없는 추운날의 캠핑이 떠올라,
모닥불 바베큐 마시멜로 별 입김 커피 담요 코펠 새벽이슬...
캠핑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주르르 당신과 함께 떠올라,
안돼 그만. 어렵게 어렵게 상상의 문을 닫았다.
울컥, 눈물 한줌이 묵구멍을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만 만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