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비밀 사이

by 마감했나연

<추천 곡> 불안한 내 맘 달랠 곳은 너밖에 없어 - 예빛


*소설 속 모티브와 콘셉트 외의 인물, 단체, 장소, 사건 등은 모두 실제와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지난번 식당 앞에서 들렸던 셔터 소리는 결국 그냥 지나가는 소음이 아니었다.


며칠 뒤, 나연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등을 굳혔다.


“나 기자, 잘 지내? 나, OO일보 OOO 선배야.”

“아, 선배. 무슨 일이세요?”

’내가 선배 번호를 저장 안 해뒀었구나.‘


그의 다음 말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식당 앞에서 우연히 본 건데, 너 유원우랑… 사귀는 거야? 내가 사진을 몇 장 찍었거든. 고민하다가 그래도 너한테 먼저 연락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나연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선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말해봐. 기사 내도 돼? 아니면 그냥 덮어줄 수도 있고.”


‘기사 내도 돼?’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질문을 그녀 자신이 받아볼 줄은 몰랐다. 기자가 된 뒤로 수없이 다뤄온 열애설 기사. 누군가의 사생활을 드러내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자신과는 무관한 세계처럼 느껴졌었다.


“아니요, 선배. 그런 사이 아니에요. 친분은 있지만… 그냥 밥 한 끼 먹은 거예요.”


반사적으로 변명처럼 내뱉었지만, 자신조차도 그 말에 확신이 없었다. 선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난 너 생각해서 물어본 거니까.”


전화를 끊고 난 뒤, 나연희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기사를 쓰면?‘


그동안 연예인의 열애설은 그녀의 밥벌이가 되어왔다. 누군가의 사적인 순간을 공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클릭 수를 올렸다. 그녀가 아무리 다루고 싶지 않아도 회사에 소속된 기자로서 반드시 다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가 된 상황. 이 관계를 어떻게든 감춰야 하는 입장에 놓이자, 지금까지의 그 모든 과정이 잔인하게만 느껴졌다.


기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직업인데, 정작 그녀는 그 시선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스스로 기사를 쓰는 것과 선배 손에서 기사가 나가는 것. 어느 쪽도 그녀에게는 편안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나연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연예인의 연애는 단순한 '기삿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의 일부였고, 그녀는 지금 그 무게를 고스란히 체감하고 있었다.


나연희는 휴대폰을 들어 유원우의 이름을 바라봤다.


‘이 관계를 지키려면, 나는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


저녁 무렵, 늘 만나던 카페 창가에 앉아 있던 나연희는 유원우를 기다리며 멍하니 커피잔을 돌리고 있었다. 선배와의 통화 이후 마음이 복잡했다. 머리로는 대충 넘어갈 일이라고 되뇌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불안했다.


문이 열리고 유원우가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살짝 지친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는 나연희를 보자마자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목소리가 좀…”

유원우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연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말을 꺼냈다.


“원우 씨, 지난번 밥집에서 나올 때… 누가 우리 사진을 찍는 것 같았잖아요.”


그는 순간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나연희는 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그게 타사 선배 기자였어요. 고민하다가 나한테 연락을 했더라고요. 열애설로 기사 낼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유원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겁게 흘러가는 침묵 속에서 그는 눈을 내리깔고 손끝으로 잔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했어요?”


나연희는 속이 답답해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안된다고 했죠.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그 말에 유원우는 피식 웃었다. 장난기 없는, 어쩐지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그의 반응이 생각보다 덤덤해 나연희는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근데, 선배가 계속 고민하는 것 같아요. 결국 누군가는 기사를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제야 유원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눈빛이 진지했다.


“저는 숨길 수 있다면 숨기고 싶어요. 솔직히, 내 음악보다 사생활이 더 주목받는 건 지치거든요. 팬들도, 대중들도 음악보다 다른 것에 먼저 반응하고… 그러다 보니 저도 제가 무대 위에 있을 때만 진짜 저인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그래도 꼭 나가야 한다면… 나 기자님, 당신이 써줬으면 좋겠어요.”


나연희는 그 말을 듣고 순간 말을 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제가요?”


“적어도 당신이라면, 내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풀어줄 것 같으니까. 그냥 가십처럼 소비되지 않도록.”


그의 말에 나연희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이 상황이 무겁고 벅찼다. 그동안 타인의 연애를 기사로 쓰는 일이 자신의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연예인의 연애가 내 밥벌이였는데, 이제는 내가 그걸 숨겨야 하는 입장이라니.’


나연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난, 당신을 이런 기사로 쓰고 싶진 않아요.”


그 말에 유원우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대화는 그 지점에서 멈췄지만, 둘의 관계는 더 선명해진 듯했다.


밖으로 나선 두 사람은 한동안 나란히 걸었다. 어둑해진 거리 위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마음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나연희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유원우는 미소를 지었다. "기자님 첫인상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 첫인상이요?"


"네. 처음 기자간담회랑 인터뷰 자리에서 봤을 때, 솔직히 좀 차갑다고 느꼈어요. 딱 할 말만 하고, 감정은 전혀 안 보이는데… 그게 이상하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주변의 시끄러운 분위기랑 딱 분리된 사람 같았어요."


나연희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다.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본 사람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보통은 '까다로워 보였다'고 하던데, 멋있다고 하니까 어색하네요."


"아뇨, 정말 그렇게 보였어요. 무심한 듯 질문을 던지는데, 그 안에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달까? 그래서 좀 경계도 했죠. 이런 사람이 내 본모습까지 들춰내면 어쩌지 싶어서."


나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업 특성상 벽을 세우는 일이 습관처럼 굳어진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쉽게 다가가지 않고, 다가오게 두지도 않는. 그런데 유원우는 그 벽을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게 넘어오고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때요? 여전히 경계심이 드나요?"


유원우는 한숨처럼 짧은 웃음을 흘렸다. "글쎄요. 지금은… 경계보다는 다른 감정이 더 크네요. 그냥, 기자님이랑 이야기하는 시간이 편해요. 나를 꾸미거나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느낌?"


나연희는 잠시 눈을 피했다. 지금 이 관계는 어딘가 위험했다. 기자와 취재원의 선을 넘는 순간, 감정은 일이 되고, 일은 복잡한 문제로 변할 테니까.


"원우 씨, 우리 이렇게 계속 만나는 거, 정말 괜찮을까요?"


유원우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냐고 묻는다면… 이미 답은 나왔죠. 기자님도 저도, 이 만남이 그냥 우연으로 끝나길 원하지 않으니까요."


나연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멀찍이 위치한 벤치를 바라보며, 그 경계선을 넘을 용기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넘지 않으면 편할 것이고, 넘는 순간 무언가를 잃거나 더 큰 책임을 질지도 모르는 그 경계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이미 조금씩 기울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만남을 계속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드러나겠지. 내가 직접 써야 하는 상황이 정말.. 오게 될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그녀의 마음은 불안함과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만약 그날이 온다면, 나는 내 손으로 우리 이야기를 써야 할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맡기고 모르는 척 외면할까.’


그 순간, 옆에서 유원우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기자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요…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유원우는 진심을 담아 조용히 말했다.

"지금 이 마음, 이렇게 우리가 눈치 보며 만나는 순간들.. 언젠가 후회할까 싶어 피하면 먼 훗날 돌아봤을 때 제 자신이 너무 비겁할 것 같아요. 설령 누군가 우리 이야기를 기사로 써도, 그게 기자님이라도.. 전 괜찮아요.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 둘이 만드는 거니까."


이 말을 들은 나연희의 눈가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유원우는 자신의 이름 석자만으로도 기사 한편이 만들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녀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저.. 진짜 기사로 쓸 수도 있어요. 저 너무 믿지 마요.“

나연희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알아요."

유원우는 웃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자님이 쓰면, 난 오히려 좋을 것 같아요. 적어도 기자님이라면.. 우리 이야기를 따뜻하고 솔직하게 써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가볍게 생각하는 만남도 아니고요. 언젠간 밝힐 생각이었어요. 그 시기가 좀 일찍 온 거라고 생각하죠 뭐. 물론 좀 걱정은 되지만.”


나연희는 숨을 고르며 파르르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그 순간, 바람이 스쳐 지나갔고, 벤치에 걸린 잎사귀도 바스락 소리를 냈다.


결국, 그녀의 마음은 점점 기울고 있었다.


나연희는 다시 유원우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 정말 괜찮아요?"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요. 기자님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이니까요."


나연희는 작게 웃음을 지으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답했다.

‘그래.. 나도 지금은 그저 한 사람으로서 당신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아.‘


잠시 후 나연희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힘들어지는 건 조금도 원하지 않아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전 버텨볼 거예요. 선배 기자.. 어디 한번 기사 내보라 하죠. 제가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이에요. 최대한 버텨볼게요.”


그 말에 유원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 그 속에 담긴 다짐과 따뜻한 배려가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자님.“

유원우가 목이 살짝 메인 듯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저도, 당신이 상처받는 건 조금도 원치 않아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눈을 맞추며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지켜줘요. 나는 당신을 지키고, 당신은 나를 지켜주고. 뭐가 닥쳐오더라도.. 우리 둘이서 같이 버티고, 같이 넘어가요. 그건 해줄 수 있죠?“


그의 목소리는 결연했지만 따뜻했다.


“기자님이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이미 충분해요.”


저 멀리 위치한 벤치 위로 노을빛이 물들고 있었다.

언젠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 온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름답기만 했다.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10화선을 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