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정이 제발 크리스탈 월드에 다시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녀가 행복하게 지내 상담할 거리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고, 둘째로는, 사실 이게 진짜 이유인데, 진실을 말할 자신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며칠 째 내 머릿속에서는 얼굴이 다른 두 여자와 휘준이 각각 다른 차림새와 말투로 호텔 캡스에 입성하는 장면이 맴돌았다. 동시에 화가 났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양다리까지 모자라서 세 다리를 걸치다니. 여자친구랑 같이 올린 게시물을 숨기기 기능을 이용해 민정에게 교묘히 감춘 치밀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 이중성을 알고 나니 인스타그램 속 시원시원하게 웃고 있는 휘준의 모습이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매번 울리지도 않는 휴대폰을 주시하고, 열리지도 않는 철문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매일 같이 애타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9시가 되면 칼같이 가방을 들고 허겁지겁 크리스탈 월드를 빠져나왔다. 투명해지라는데, 투명해지는 게 과연 민정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인가 싶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니 민정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품에 안고 집에 갈 것 같았고, 내가 본 모든 것을 묵인한다면 민정은, 이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고 순진한 최민주는 저 남자에게 계속 연락을 할 것이고, 내 멍청한 한 마디로 인해 어쩌면 이미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을 테고, 민정은 그렇게 영원히 과거에 묶여 있을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것인지, 하얀 거짓말을 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원래 하던 대로 들어주기만 할 것인지 갈등의 기로 사이에 섰다. 그냥 오지 않았으면 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떠날 때의 민정의 만족스러운 표정과 다시 온다는 말이 자꾸만 목구멍에 걸렸다.
민정이 떠난 지 10일째 되고 내가 호텔 캡스 앞 휘준을 본 지 나흘째 되는 날, 나는 아홉 시 정각이 되면 쏜살같이 버스 정류장까지 달려 나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02번 버스가 오기까지는 대략 5분 남짓. 전력을 향해 뛰어가면 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오지 말아야 될 손님이 오고 말아서, 나는 얌전히 카카오버스 어플이 켜진 휴대폰을 그대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민정의 표정엔 어느새 어두운 그늘이 흔적도 없이 깔끔히 걷어져 있었다. 마치 오래된 숙원사업을 끝마친 듯 홀가분한 얼굴로, 그녀는 오른손에 종이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퇴근하려는데 죄송해요. 오늘 예정에 없던 야근을 해버려서.”
민정은 내게 그것을 건네주며 덧붙였다.
“저희 회사 근처에서 파는 스콘이에요. 기프티콘으로 드리려다가, 아무래도 직접 찾아뵈어서 감사하단 인사도 드리고, 여기가 또 대학로 맛집 이래서…. 저는 못 먹어 봤는데 먹고 맛있으면 후기 남겨주세요. 저도 사 먹게.”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퇴근해 보시라며 황급히 문을 나서는 민정을 내가 불러 세웠다.
“저 근데….”
민정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셨나요?”
기분이 좋아 보이시길래. 조그맣게 덧붙였다. 차마 휘준의 이름을 거론하기엔 내가 너무 무례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대충 이리저리 얼버무렸다. 민정은 아무래도 휘준에게 연락을 한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그를 그리워하는데 내가 민정에게 연락해 보라는 불씨까지 지폈으니 연락하지 않고는 못 배겼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민정은 재회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신나 하겠지. 그런데 민정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새로운 연애요? 아, 그 남휘준 말씀하시는 거예요?”
민정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연락 안 하고 차단했는데요?”
나는 멍하니 민정을 바라보았고, 그런 나를 민정은 뭐가 문제냐는 듯 똑같이 빤히 바라보았다.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한 상태로 잠시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 민정이 신고 있는 검은색의 에나멜 구두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왜 연락 안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렵사리 품고 있던 궁금증을 꺼내놓았다. 그것이 꼭 휘준에게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왜 안 했냐고 따지는 투 같아서 괜스레 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냥 제 자신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민정 뒤에 있는 창문 너머로 4월의 가는 봄비가 살랑살랑 창틀을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을 만나는 동안 정작 저 자신에 대해선 잘 몰랐더라고요. 제가 저번에 술자리를 좋아한다고 했었던가요? 삼겹살에 반주 한 잔 기울이면서 얘기하는 걸 즐긴다고 했었나요?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그 남자의 모습이 저와 닮아 있었다고 했었나요?
그렇게 말했다면 유감이네요. 저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도 술도 싫어하고, 해물파전보단 파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대기업으로의 이직에도 관심 없는 사람이에요.
남휘준, 초반엔 연락 참 잘했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약속 있을 때마다 따박따박 카톡 남겨주고, 자리 옮길 때마다, 늦은 술자리 끝나고 집 들어가기 직전 새벽에도 문자 하나 보내주고. 그런데 술자리는 왜 갈수록 늘어만 갈까요? 직장도 그대로, 직책도 그대로, 만나는 지인들도 그대론데 왜 한 달에 한 번 있던 술자리가 일주일에 세네 번으로 바뀌는지 알 수가 없네요. 오늘 하루 종일 카톡도 안 보고 뭐 하냐고 물으니까 얼버무리다가, 학부 때 동아리 선배들이랑 한 잔 하러 왔대요. 그 선배들은 모두 다 여자였고요. 제가 매번 이런 레퍼토리 때문에 표정이 안 좋아지니까 어느 날부턴 그 자리에 저도 끌고 가기 시작했어요. 왜 자꾸 나를 의심하냐며, 정말 친구일 뿐이라고, 네가 직접 와서 보라고. 남휘준 여자친구입니다, 요란하게 여기저기 인사도 시키고, 새벽까지 소주에 맥주에 양주에…. 전 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매주 타는 듯한 알코올 용액을 식도로 흘려보냈죠.
첫눈 오는 날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신촌 사거리에서 파스타를 먹고 카페에 가서 마시멜로가 올려진 뜨거운 핫초코를 후후 불어 마시는 것이 제 연애의 소소한 로망이었어요. 그리고 고대했던 12월의 첫눈을 맞으며 그 사람은 저한테 무슨 파스타냐면서, 이런 추운 날에는 해물파전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면 그게 바로 낭만이지 뭐냐면서 제 손을 붙잡고 처음 보는 전집에 들어갔어요. 식어서 눅눅해진 파전을 젓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으니까 그러더라고요. 어때, 역시 이런 날엔 파전이지?
사실 저는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어요. 아니, 진절머리 나게 싫어요. 스타트업이고 뭐고 그냥 디자이너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말만 안 했을 뿐, 저는 현재 직종 변경을 위해 준비 중이에요. 남휘준은 대기업 디자이너 신민정을 사랑하는 거지, 그냥 인간 신민정을 사랑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타인에 대한 사랑, 동식물에 대한 사랑, 실존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사랑,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도 모두 사랑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건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요. 살아온 지난 날들 내내 저는 사랑에 목을 매는 여자였어요. 사랑이 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추하게 만드는지, 매번 타인에게 사랑을 갈구했고 그에 상응하는 사랑의 징표가 돌아오지 않으면 매번 실망했죠. 이젠 그 지독한 사랑의 저주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사랑에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민정은 쑥스럽다는 듯 옆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웹툰 작가 준비 중이에요.”
순간 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 저 웹툰 엄청 좋아해요!”
당황한 민정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혔다. 민정은 고맙다며, 훗날 자신의 웹툰이 나오면 꼭 연락하겠다며, 그땐 웹툰에 댓글 한 번 달아달라며 부탁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네, 꼭 달게요. 1등으로 달아서 베스트 댓글까지 될게요. 별점도 꽉 채워서 드릴게요. 그러니까 꼭 웹툰 작가가 되어주세요. 그 꿈을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전 웹툰을 정말로 좋아하거든요. 민정님이라도 기필코 꿈을 이루셔야 해요, 저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리고 나는 민정을 보내고 나서야 내가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거짓이 참을 이기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