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지금도 상담되죠?”
눈가 주위로 열꽃처럼 울긋불긋 피어난 반점들이 가득한 여자가 다짜고짜 문을 열고 하는 말. 나는 마감 전 마무리 청소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탈 월드의 원칙은 사전 예약 후 방문이다. 시계를 보니 마감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서둘러 귀가해서 5일간의 피로를 풀어도 모자란 이 금요일 밤에, 무슨 일로 이 외진 심리상담센터에 찾아온단 말인가. 내심 서둘러 마감하고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까 다 못 본 웹툰이 밀려있는데. 열 두시 전에 올라오는 내일 분량의 새로운 회차를 읽으려면, 서둘러 지난주까지의 회차를 읽어야만 했다. 방금 전까지 읽던 말풍선들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그 너머로 한이 서려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톡, 건들면 툭, 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고 오지, 뭐가 그리 급할까. 원망 한 스푼 담은 눈빛으로 여자에게 한 번 눈길을 준 뒤, 마실 음료수를 물었다.
“아뇨, 음료수는 됐어요. 물 한 잔만 마실게요.”
물기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을 때마다 모든 음절이 요동쳤다.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잔뜩 울다 온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일 초라도 빨리 2층의 크리스탈 룸으로 들어가는 것이겠지. 모든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여자가 말없이 내민 카드를 받아 카드 리더기에 긁고, 사전 설문지와 규칙이 쓰인 안내문을 보여주었다. 나는 재빠르게 설문지를 훑어보았다. 그 사이, 여자는 안내문을 읽다가 끝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 만한 항목은 없는데 이상했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 입술을 말고 연신 콧물을 들이켰지만, 그럴수록 눈가만 더 축축해질 뿐이었다.
“흡, 저, 죄송한데, 휴, 휴지, 좀만, 주세요.”
신민정. 나랑 같은 나이인 29살. 상담 주제는 사랑. 내가 도통 흥미 없어하는 분야이다. 정확히 말하면, 흥미를 붙일 수가 없다. 누가 면전에서 대차게 뻥 차이고 다음 사랑을 꿈꾸겠는가? 사랑은 법적 관계로 귀속되지 않은 두 인간의 순간적인 스파크에 불과하다고 믿는 나로서는 우스운 고민이었다. 세상에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몇 년 본 사람과의 역할 놀음으로 머리를 싸매다니 팔자 좋다 싶었다. 내가 이렇게 배배 꼬인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앞으로도 모를 거고, 평생 몰라야만 한다.
민정을 크리스탈 룸으로 안내하고는 그녀가 진정되기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시침은 부지런히 9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민정이 앉아있는 벽 윗편에 걸려있는 유리 시계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얼마나 대단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는 건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만 집중력을 잃고 머릿속으로 아까 본 웹툰의 뒷내용을 상상할 무렵 민정이 입을 열었다.
“잡고 싶어요.”
누구를요?
“저한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는데.”
남자친구를요?
“그런데 잡힐 듯 말 듯하다가도 잡히지 않아요. 제가 한 발짝 다가가면 그 사람은 두 발짝 물러나요. 그래서 뒤로 한 보 후퇴하면, 상대는 제 쪽으로 세 보 전진해요. 드디어 잡히는구나, 하고 그 사람을 안으려고 하고 하면 저 멀리 도망가 버려요. 잡히겠다는 건지, 잡히기 싫다는 건지.”
본론만 말하세요. 서론이 장황하게 긴 민정의 말은 내 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예정에 없던 추가 근무를 하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주제는 헤어진 여자의 재회 상담. 참으로 고리타분한 말이다. 학창 시절 몇 반 남자애를 좋아하니 고백을 먼저 해야 되니 말아야 하니 등의 따분한 하소연을 들어준 적은 있지만 서른을 코 앞에 둔 지금, 인연 하나에 일희일비할 때는 아니지 않은가. 젤라 말대로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이 잘 들어준다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끼는 지금이다.
“그러면 자, 잡힐 때까지 끝까지 쫓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나도 모르게 답답해서 내뱉었다. 그 사이 민정은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텅 빈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반짝거리는 샹들리에가 한 바퀴 빙 돌고 있었다.
“근데 잡으면 안 돼요. 저도 이미 정답을 알고 있거든요. 이 사랑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는 거.”
민정은 잠시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고르는가 싶더니 아까보다 차분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빠랑은 20살 때부터 만나기 시작했어요. 아, 오빠라는 호칭은 이제 아니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전 남자친구라고 하면 너무 길고, 음, 그 친구, 아니면 걔라고 하기엔 제가 나이가 더 적고. 그냥 휘준 오빠라고 할게요. 이렇게 본명을 밝혀버렸네. 휘준 오빠는 저의 20대를 빈틈없이 꽉 채워준 사람이에요. 너무 꽉꽉 눌러 담은 나머지 넘쳐버려서 잔여물이 질질 샐 만큼. 저는 그게 싫지 않았고, 오히려 넘쳐버린 오빠의 사랑을 소중하게 모아놓아서 나의 30대를, 아니 여생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죠. 이제는 모두 물거품이지만…
모든 게 처음이었어요. 첫 연애, 첫 썸, 첫 데이트, 첫 고백, 첫사랑. 그리고 에브리타임 (*대학교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람을 만난 것도 처음이었고요. 동아리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사회과학관 1층 로비에 떨어진 학생증을 주워서 찾아준다는 글을 올렸어요. 금세 댓글이 달렸어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학생지원센터에 맡겨놓는데, 그 사람이 당장 학생증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서 직접 만나서 전해주기로 했어요. 동성이 아니라서 좀 망설이긴 했지만…. 어차피 학생증만 전해주고 사라질 텐데, 이런 화장한 날씨에 좋은 일 하나 한 셈 치자고 생각했죠. 사회과학관까지 가기도 귀찮아서 제가 수업을 듣는 디자인관으로 오라고 쪽지를 보내고 기다렸어요. 약속된 시간에 칼같이 1분의 오차도 없이 어떤 남자가 멀리서 뛰어오더라고요.
모 대학 교수가 그랬어요. 진짜 사랑은, 관능적 경탄으로 시작하는 거라고. 첫눈에 반하는 것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빠져드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요. 저는 그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어요. 첫인상은 3초 안에 결정된다는데, 3초도 너무 길었고, 그 남자의 짙은 눈썹이, 우주를 품고 있는 눈망울이, 시원시원하게 뻗은 코가, 도톰한 입술이 제 두 눈에 담기는 그 찰나의 순간에 마음을 뺏겨버렸어요. 새내기 시절 어린 마음에 미팅도 잡히는 대로 다 나가고, 동아리에 괜찮은 선배 있는지 구경하고, 교양 수업에서도 내 옆자리 앞자리 대각선 자리까지 두리번두리번 둘러대고 그랬는데. 우습게도 제 사랑은 분실물을 찾아주면서 시작된 거죠.
학생증 사진은 두꺼운 안경 낀 우등생 같아서 기대 안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단정한 거 입고 올 걸 후회했어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대학생 돼서 살도 많이 빼고, 라식도 해서 달라진 거더라고요. 휘준오빠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데, 제 모든 운을 여기다 다 끌어 쓴 것 같았어요. 반달처럼 휘어지는 그 눈매가, 누구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블랙홀 같았어요. 지금도 그 순간만큼은 똑똑히 기억해요. 말하다 보니 주책 같네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민정이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이내 자조적인 실소를 터뜨렸다.
“아무튼 휘준 오빠는 감사하다고, 사례로 기프티콘을 드리려고 하는데 무슨 카페 좋아하시냐고 묻더라고요. 아니면 치킨? 올리브영? 편의점? 별의별 상품권을 다 나열하고 있길래, 제가 겁도 없이 당돌하게 외쳤어요. 밥 사주세요! 얼굴이 홍당무가 돼서 당황해서는, 바, 밥이요? 하고 되묻는데, 그 모습조차 귀여워 보여서, 나 진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싶었어요. 아… 죄송해요, 헛소리를 너무 많이 했다. 본론만 말할게요. 어쨌든 학생증을 찾아준 걸 계기로 밥을 먹었고, 보답을 덜 받은 것 같다는 핑계로 여러 번 만났고, 각고의 노력 덕분에 드디어 제가 원하는 장면에 도달했어요. 통금 시간 직전에 기숙사 앞에 데려다주면서 휘준 오빠가 고백했어요. 민정아.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이렇게 묻길래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은 거,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만 나는 거 아닐까요?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지금 그래. 민정이를 보고만 있어도 좋고, 하루 종일 네 생각만 나.’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 같아. 킥킥, 지금 생각해 보면 인터넷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오글거리는 대사인데, 그때는 왜 그리 로맨틱하게 느껴졌는지. 문과 남자는 역시 고백부터 다르다며 설레했었지요.”
민정의 기나긴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다가 갑자기 울리는 진동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모르는 계정의 댓글이 떠 있었다.
뭐야. 나 차단했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자의 새로운 계정이다. 나는 재빠르게 그 계정 또한 차단한 뒤 알림이 울리지 않게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꺼놓았다. 자꾸 검지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는 나를 향해 민정이 무슨 일 있으시냐고 물었다. 내가 불안할 때마다 무의식 중에 하는 습관이다. 나는 괜찮다고, 하던 얘기마저 하시라고, 머릿속에서 잡념을 떨쳐내고 빠르게 민정의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무 살의 패기였던 것 같아요. 서너 달 뒤에 입대 예정인 에타에서 만난 남자와 사귄다, 딱 그 나이였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죠. 부모님은 아직도 저희가 어떻게 만났는지 모르세요.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신원도 확실한 사람이고, 불순한 경로를 통해서 만난 것도 아니고, 시대가 변했다지만 여전히 부모님 세대에선 온라인 만남은 인식이 좀… 그렇죠.
행복했어요. 세상 모든 간질간질한 사랑 노래는 내 얘기 같고 마치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된 것 같았죠. 그리고 두려웠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될까 싶었죠. 인생에 굴곡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만족하는 대학에 왔고, 좋은 친구도 사귀고,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 지금 내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남자라니. 나는 이만큼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이런 고양된 상태에서 갑자기 불행이 닥쳐오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그때의 난 그 불행을 견뎌낼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무서웠던 건 그 사람과의 이별이었어요. 상상하기도 싫은 거예요. 여느 연인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이별을 맞이할 텐데 이 모든 추억이 과거형이 되어버린다고?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어요. 날마다 불안감은 무럭무럭 자라만 갔고, 속앓이를 하다가 결국 오빠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뭐가 문제야. 결혼하면 되지.
그러면 헤어질 일도 없잖아, 하면서 저를 꼭 안아줬어요. 제 등을 토닥여 주는데 마음이 사르르 풀리더라고요.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결혼하면 되잖아. 이 연애의 끝이 결혼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굳게 다짐했어요. 이 남자,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이 고작 몇 개월 만나놓고 결혼 얘기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코웃음 칠 얘기지만 그때는 이 사람이 내 전부 같고, 내 생에 다른 사람은 없을 거고,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거라 생각했어요. 누가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주지 않겠다면서요.
저는 기숙사에 살았고, 휘준오빠는 학교 후문 쪽 원룸에서 자취했어요. 거의 그 방에서 살다시피 했죠. 반동거라고 하죠. 기숙사비가 아까울 정도였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빠 집에 갔으니까요. 이것도 부모님은 모르는 일이에요. 공강 시간에 잠깐 눈 붙이러 가고, 개강 총회나 동아리 회식이 있는 날에는 오빠가 데리러 오고, 그대로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하나 안줏거리 하나씩 사서 집에서 2차로 마시고, 기분 꾸리꾸리한 날에는 자취방에서 엽떡이니 치킨이니 죄다 시켜서 마구마구 먹어대고. 그러다가 식곤증으로 눈이 감기면 오빠가 이부자리를 새로 펴주고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줬지요.
이런 행복한 날이 지나서 휘준오빠는 훈련소에 들어갔고 저는 바쁘게 지내면서 오빠를 기다렸어요. 주변에서 일말상초라면서, 군대 기다리지 말라면서 하나둘씩 거들었는데 괜찮던데요?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싸우지도 않았고요. 아, 중간에 메르스 때문에 휴가 한번 잘린 것만 빼면….
저희는 대학교의 비공식 커플이었어요. 주변에서는 다들 부러워했죠. 어떻게 그렇게 안 싸우고 예쁘게 사귀나면서, 그렇게 오래가는 비결이 뭐냐면서요.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애초부터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돼. 그러면 싸울 일도 없어. 근데 우스운 건 저와 제 남자친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상극의 커플이었어요. 참, 누가 누구한테 충고하는지.
그래서 미루고 미뤄왔던 그 말이 오빠의 입에서 나왔을 땐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공통점이 같은 대학교를 졸업한 것뿐인 연인이 오래가봤자 얼마나 오래가겠어요? N극과 S극을 어거지로 밀어붙여도 손에 힘을 풀자마자 금세 튕겨져 나가잖아요? 그런 거죠. 안 맞는 연애는 자석 같은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