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이 가고 난 뒤 며칠이 흘렀고, 그날의 요란한 일상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크리스탈 월드에는 어김없이 파리만 날렸고, 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면 이따금씩 2층으로 올라가 시키지도 않은 크리스탈 유리 벽을 닦았다. 어떨 때는 멍하니 앉아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했다. 수연이 내게 상기시켜 준 사람. 그 아이의 근황을 찾기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을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타고 갔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름을 바꾼 건지 SNS를 안 하는 건지 그 애의 흔적을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흔한 이름이 아님에도 그랬다. 그렇게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끊어냈는데, 요즈음 왜 자꾸 미련이 생기는 걸까. SNS 계정을 찾으면 어쩔 건데. 다시 연락이라도 하게? 스스로를 질타하며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내리눌렀다. 수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친구라는 존재가 떠올라서 그랬다. 어차피 그 아이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는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새 예약이 들어왔나 싶었는데 수연이었다. 심장이 갑작스레 요동쳤다. 마지막에 괜한 제안을 해서 기분이 나빴나? 너무 듣고만 있어서 상담이 만족스럽지 않았나? 제발 젤라의 귀에만은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며 채팅방에 들어갔다. 수연은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짧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상담사님, 제가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감사 인사를 드려요. 그날 너무 많이 울고 갑자기 안긴 것도 그렇고 많이 당황하셨죠? 죄송해요. 저는 많이 괜찮아졌어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건 아니에요. 친구는 여전히 없고, 연락은 아무한테도 안 와요. 그래도 상담사님이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서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어요. 제 이야기를 이렇게 잘 들어주신 분은 상담사님이 유일해요.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또 이용할게요. 감사합니다. 번창하세요.
수연의 메시지를 읽고 한층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혹시나, 행여나 수연이 만족하지 못했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나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에요. 혹시 제가 너무 조용히 있어서 불만족스럽진 않으셨나요? 원하신다면 수연님의 의견을 반영하여 다음 상담부터는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초조하게 적어 나갔다. 후회가 되었다. 제아무리 들어주기만 된다 해도, 구색만 갖춘 허술한 심리상담센터라 해도 뭔가 해결책 비스무리한 것이라도 제시했어야 하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상담 때는 기필코 한 마디라도 더 하겠다고 다짐했다. 연이어 수연의 답장이 왔다.
아니에요. 그게 오히려 더 좋았어요. 제 말에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셔서 제 이야기를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 제 민낯을 드러낸 적이 없어요. 항상 제 자신을 꽁꽁 감춰 왔는데, 상담사님 앞에서는 그 허물을 벗은 느낌이에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이 대단하세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민낯을 드러내다.
허물을 벗다.
난 각각의 두 어절을 읽고 또 읽었다. 고백하자면, 이런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것은 입으로 뱉지만 않았을 뿐 속으로 그녀의 처지와 비교하며 나의 처지를 비관했으니 사실이 아니었고, 듣기만 했던 것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고용주인 젤라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와 달리 솔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 또한 수연이 손가락질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사회에 편입된 구성원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녀의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거겠지. 어쨌거나 정말 간만에 들어보는 수연의 과분한 찬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였던 내가 미약하게나마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뭔가 한 발짝 나아간 느낌이었다.
이대로 대화를 종료하려고 채팅방을 나갔다가, 무언가 떠올라 추가적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입력했다.
위층 때문에 웃다가도 아래층한테 상처받고 그걸 건너편 이웃에게 위로받는 게 인간관계래요. 사람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이건 나 자신에게도 전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서로를 헐뜯을까.
왜 상대방을 미워할까.
왜 좀 더 솔직하지 못할까.
왜 진실을 약점 잡아 괴롭힐까.
그게 왜 내 흠이 되는 걸까.
그에 대한 수연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쓰고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어른한테 훈계하는 꼴 같아서, 괜히 민망해져 채팅방을 후다닥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마무리 정리를 하는데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내 품에 안긴 수연과 딱딱하게 굳은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확 달아오르기도 했지만,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나는 문득 알 수 없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수연도 나처럼 무언가 달라졌다고 느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수연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녀가 크리스탈 월드에 다시 오지 않길 바라며, 이 잔혹한 세계가 그녀에게 좀 더 따뜻해질 수 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