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흥미로운 소식이 하나 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탈 월드에서의 9시간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보던 웹툰을 보고 또 보고 1화부터 최신화까지 통째로 다시 봐도 오지 않는 9시가 금세 찾아오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출근하는 오전 11시 이전부터 찾아와서 퇴근 시간인 9시 이후까지 크리스탈 월드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붓는 자다. 사장인 젤라보다 더 관심이 많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모든 SNS 게시물에 댓글을 달아주었고, 이따금씩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손님 하나 없이 고요한 상담실에 팽팽한 긴장감을 걸어놓는 이 사람, 의자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나를 벌떡 일으켜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게 하는 이 사람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래, 댓글만 달고 크리스탈 월드에 직접 찾아오지 않는 익명의 이방인이 너무 궁금하다. 궁금해서 직접 집까지 찾아가고 싶다. 그 자의 집 앞에서 나올 때까지 연신 초인종을 눌러대고,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붙잡고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이렇게까지 크리스탈 월드에 관심이 많냐고 물어보고 싶다. 대체 크리스탈 월드의 무슨 매력이 그를 이토록 강하게 끌어당겼는지 캐묻고 싶다. 언제까지 댓글을 달 것이냐고, 언제쯤 나를 괴롭히는 것을 멈출 것이냐고 따지고 싶다.
눈물 나게 고마워서 넓적다리 안쪽을 세게 꼬집어주고 싶은 이 남자는 며칠 전부터 교묘한 방식으로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있으나 마나 하는 크리스탈 월드 인스타그램 계정에 게시물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을 시킨 적은 없지만 행여나 수연이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와 줄까 싶어 빈 깡통 계정을 되살려 프로필 사진도 설정하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하얀 보석 사진을 따왔다) 대문 앞에 피어난 진달래 꽃도 찍어서 올리고, 청소가 잘 된 날이면 번쩍번쩍 빛나는 상담실 안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젤라에게 상담실 안을 찍어서 올려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만면에 의미심장한 미소만 띤 채 괜찮으시면 그렇게 하세요,라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일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만 하고 이유는 묻지 못했다. 항상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 마냥 자리를 뜨는 젤라를 보면서 참 특이한 사람이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거나 모니터 앞에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을 때 날 깨운 건 그의 댓글이었다. 지잉, 지잉하며 울어대는 센터 스마트폰을 재우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잠금화면을 풀었다. 평일 한낮부터 크리스탈 월드에 영광스럽게도 불필요한 집착을 보여주는 익명의 비밀 계정은 내가 올린 게시물에 지독하게 악플을 달고 있었다.
ttw_04
crystal_world님의 게시물에 댓글을 남겼습니다 : 돈 아끼려고 보석인 척 유리로 도배해 놓은 것 봐라 ㅋㅋ 가성비 따지니까 사람이 안 오지
ttw_04
crystal_world님의 게시물에 댓글을 남겼습니다 : 감성팔이 역겹다. 이 좆같은 컨셉은 뭐임? 이런 데 돈 쓰는 애들은 얼마나 호구인 거냐?
flowering_20
crystal_world님의 게시물에 댓글을 남겼습니다 : 오, 상담센터인데 인테리어가 되게 감각적이네요. 카페인 줄 알았어요. 사장님 예술하시는 분인가?
↳ ttw_04님이 flowering_20님의 글에 답글을 남겼습니다 : 너도 돈만 있으면 다 저렇게 할 수 있음. 어차피 업자가 다 해주는 거임ㅋㅋ 개나 소나 다 함. 저런 데는 믿고 걸러라. 인스타 감성이랍시고 서민들 돈 뜯어먹는 사기꾼들.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 날씨 좋은 날에 저렇게까지 아득바득 이를 갈며 험한 말들을 뱉어내는지.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려 했다. 직장도 친구도 없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악에 받친 악플러가 우연히 발견한 계정에다가 쏟는 화풀이라고 여기며 상단바에 수북이 쌓인 알림을 가볍게 쓸어버렸다. 그런데 처음에는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울리던 알림이 며칠 뒤엔 한 시간에 한 번, 조금 뒤엔 30분에 한 번, 나중에는 테러 수준으로 핸드폰이 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웹툰을 보고, 청소를 하고, 슬쩍 잠깐잠깐 졸다가도 언제 알림이 울릴지 몰라 털 끝을 바짝 곤두세우고 기민하게 반응했다. 댓글의 수위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초등학생이 어디서 주워 들어서 할 법한 욕설에서, 인신공격 수준의 악담까지 그는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버렸다. 젤라에게 당장 말해서 고소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문자를 남기려다가도 매번 그만두었다. 두려웠다. 또다시 실패자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이 무서웠다. 젤라가 괜한 행동을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센터의 대외적인 이미지 손상은 큰 실책이라며 어렵게 얻은 일자리를 도로 뺏을까 봐 어떻게든 이 사태를 나 홀로 감내하려 했다. 악플도 애증의 표현이라 생각했기에 너무 심한 욕설이 들어간 댓글 외에는 삭제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보며 한글이라는 문자가 이토록이나 다채롭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악플러는 매번 다양한 형태로 나를 공격했다. 그 모든 화살들은 버틸 수 있었고, 무시하면 그만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결정적으로 나를 자극한 말은 욕설 한 마디조차 없었다.
이딴 데서 일하는 애는 보나 마나 친구도 없고 취준이랑 공시로 몇 년 통으로 날린 백수일 듯. 남들 직장 다닐 때 이런 데라도 다녀서 좋다고 정신승리하겠지?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부모님 얼굴 못 본다. 패배자잖아. 완전히 틀어져 버린 인생.
그 댓글을 읽고 나선 하루 종일 손발이 덜덜 떨렸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를 아는 사람인가? 크리스탈 월드에서 일했던 사람인가? 어떻게 내 인생을 모두 꿰고 있지? 스토커인가? 나를 증오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가? 본래 1차적으로 느껴야 할 분노 대신 죄의식이 내 가슴을 마구 후벼 팠다. 시간에 쫓기듯 서둘러 핸드폰을 붙잡고 그 자의 계정을 차단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결심했다. 이건 나만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이다.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아주 철저하게, 치밀하게 숨겨야 한다. 제아무리 이곳에서 상담사라고 불리며 떵떵거려도,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난 그저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몫을 해내지 못하는 예비 부속품일 뿐이니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기존의 부속품도 아닌, 분실되면 임시방편으로 잠시 끼워놓는 나사. 그러다가 더 튼튼하고 새것의 부품이 도착하면,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주제넘게도 수연을 만나며 잠시나마 설레었던 나는, 딱 거기까지인 존재였던 것이다. 자기소개서에 빼곡히 적힌 공모전 수상 내역과 대외활동, 최종 면접을 준비하면서 봤던 빛바랜 프린트물들, 일반 행정직 커트라인에서 아슬아슬하게 미달된 점수, 이 모든 것을 견뎌낸 억겁과 인고의 시간이 나라는 사람을 대변해 주지 않았다. 그 자의 말이 맞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뒤틀려 버렸다.
*
유람아!
하유람!
너 왜 거기 있어?
나, 걷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져 버렸어. 바닥이 미끄럽더라구. 그대로 물속으로 빠져버린 거 있지.
너 수영 못하잖아.
맞아.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오게?
모르겠어.
개헤엄은 칠 줄 알아?
아니.
내가 올려줄까?
진짜?
자. 내 손 잡아.
괜찮겠어?
뭐가.
나 무거운데.
괜찮으니까 빨리 잡아. 팔 아파.
알겠어.
나는 그대로 그 애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손에 미처 가시지 않은 열감을 느끼고, 나는 그 애를 놓치지 않기 위해 깍지 사이사이로 그 애의 손을 강하게 붙든다.
그 애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나를 잡아당긴다. 내 양팔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뭍으로 끌려간다. 그 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힘겨워 보인다. 나는 그럴수록 그 애의 손을 더 세게 붙잡는다. 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더, 진짜진짜로 조금만 더, 이제 다 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미안해.
그 애가 손을 놓는다.
뭐야, 왜 그래?
못 하겠어.
뭐?
너무 힘들어.
아니, 그래도 거의 다 왔는데…
미안해. 나도 못 버티겠어.
하린아, 한 번만 더 해보자. 응?
이젠 한계야.
하린이 인상을 쓰며 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것 봐. 너 때문에 빨개졌잖아.
하린이 내 시야에서 멀어진다.
안돼, 하린아.
잠시만 기다려줘.
나도 따라갈게.
봐봐, 이렇게 스스로 조금씩 헤엄치고 있잖아.
나 초등학생 때 잠깐 수영 배웠어.
하린아?
내 말 들려?
정하린!
그렇게 나는 하린의 이름만 목 터지게 외쳐대며 눈을 뜬다. 가끔은 꿈에서 꿈인 걸 알면서도 깨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람들은 이걸 자각몽이라고 부른다. 나는 유토피아에서 빠져나오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 치고, 그럴수록 현실은 차갑게 무서운 속도로 내 머리를 때린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다시 잠에 들려고 애쓴다. 잠드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따금씩 간신히 숙면을 취하는 데 성공하면 나는 그만 코마 상태에 빠지고 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내 방 천장에 붙은 별 모양 스티커가 보이고, 이것이 현실이며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때가 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하린에 대한 꿈은 자주 꾼다. 꽁꽁 숨어있다가 잊을만하면 수면 위로 불쑥 올라와 나를 여기저기 헤집고 간다. 제발 좀 오지 말라고, 네가 오면 괜히 마음이 복잡해진다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도 계속 찾아온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종일 뛰어다니지만 그녀가 흘리고 간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 없다. 그렇게 가라고 했을 땐 안 가더니 정작 내가 무너져 내릴 때만 없다. 보이진 않지만 몰각하지 않기 위해 매일 그녀의 이름을 되뇐다. 정하린, 정하린, 정하린. 하린이 싫으면서 좋다. 미우면서도 보고 싶다. 그래서 그 애를 잊는 것이 무섭다. 제일 궁금한 건 하린의 마음이다. 내가 만들어낸 하린은 나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진짜 하린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진 않을까. 그렇지만 그 애의 마음이 무엇이든 간에, 난 하린을 놓을 수 없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끌어올려준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에. 분명 그때의 하린은 날 버거워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 그 애는, 힘들어도, 숨이 가빠도 끝까지 날 땅 위로 꺼내준 사람이었는데…
요즘따라 유독 하린의 이름이 빈번하게 떠오른다. 그 이유에 대해 골몰해 본다. 수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린이 보고 싶어 진 건지, 매년 봄마다 찾아오는 계절성 외로움인 건지. 아니면, 어쩌면 나는 항상 그녀를 그리워했던 걸까? 마지막 이유는 아니길 바라면서, 예약도 없이 갑작스레 방문한 두 번째 손님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