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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도망치고 싶은 날

by 류이람

언젠가 아빠에게 내 이름이 왜 하유람인지 물은 적이 있다. 지나가는 개미의 뒤꽁무니를 가지고도 놀린다는 초등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은 당연하게도 내게 예외는 없었다. 그들은 절대로 상대방을 제 이름 석 자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김 씨 성을 가진 아이들은 김밥이 되었고, 변 씨 성을 가진 아이들은 변기 혹은 대변으로 불렸다. 나는 육 년간 부산 강서초등학교의 유람선으로 살았다. 중학교에 가서부터는 드디어 하유람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제주도 수학여행 때 우리의 주 이동 수단이었던 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선생님 입에서 유람선이라는 단어가 뱉어질 때마다 주변의 시선은 자연스레 나에게로 모아졌다. 딱히 특이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이름이었지만 그때의 어린 나는 그 시선이 그렇게 싫었다. 쏟아지는 관심을 여유롭게 즐기는 하린과는 달리 나는 그저 조용히 지나가는 학생 1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도.


아빠는 내가 자유롭게 이곳저곳으로 유람을 떠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한 곳에 갇혀있지 말고 전국팔도를, 세계도처를 누비며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 사람으로 크라고 그렇게 지었다고. 작명소에서 좋은 이름을 받아왔다며 촌스러운 이름을 주장하던 할머니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겼다며, 아빠가 얼마나 예쁜 이름을 지어준 건지 우리 딸은 평생 모를 것이라고 투덜대곤 했다.


컨테이너선 선장인 아빠의 진짜 꿈이 유람선 선장이라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아빠는 늘 더 넓은 세계를 동경했다. 본인은 조국을 무척 사랑하지만 가끔은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조그만 새장 내지 온실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고 했다. 항해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자연이 일구어낸 놀라운 절경들을 마음껏 보고 싶은데 해외에 자주 나갈 수 있는 형편이 안되니 항해사가 적격이었다고. 그래서 해양대에 갔고, 여느 동기들처럼 졸업 후 컨테이너선을 타게 되었는데, 매번 보는 것은 똑같은 파란색 바다와 무역항의 노란색 불빛이라고 투덜댔다. 그럼 유람선 선장을 하면 되잖아, 왜 안되냐는 어린 딸의 악의 없는 질문에 아빠는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크루즈선 선장은 지금처럼 휴가도 없고, 배 위에서 살아야 해서 나를 지금처럼 여섯 달에 한번 보는 것조차 힘들고, 급여도 넉넉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를 매주 주말마다 먹으러 갈 수도 없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바로 태세를 바꿔 아빠가 평생 유람선을 타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사실은 배를 영영 타지 않기를, 부산항에 다시는 가지 않기를, 그래서 우리 가족도 서울에 있는 할머니 집 근처에서 살 수 있기를. 아빠의 손을 잡고 텔레비전에서만 봤던 서울의 유명한 디저트 카페를 갈 수 있기를.


아빠의 장례식 이후 한동안은 내 이름을 볼 때마다 역겨웠다. 등하굣길 버스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일 때마다, 크루즈선이 보일 때마다 위장 깊숙한 어딘가에서부터 토기가 올라왔다. 항구 근처에 발을 들이기 싫어서 구태여 먼 길을 돌아간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바다 근처에 사는 게 싫다며 엄마에게 제발 이곳을 떠나자고 애원했다. 그것도 안되면, 개명을 하겠다고. 제정신으로는 유람이라는 이름으로 피 묻은 바다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흐느꼈다.


엄마는 개명만큼은 안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게 누가 지어준 이름인데. 그땐 엄마가 지독히도 미웠지만 지금은 그 선택이 백 번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옥 같은 세상에서 도망치고, 회피하고, 사라져 버리고, 없어지고 싶었던 난, 나라는 존재를 조용히 지워버리고 싶었던 열여덟의 하유람은, 그런 엄마의 혜안까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때부터 이름을 숨기게 되었다. 단발성 만남으로 끝날 것이라고 판단되는 사이에는 가명을 썼다. 헷갈리지 않기 위해 앞으로 죽 쓸 세령이라는 이름도 만들어 놓고.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이니, 내 이름이 유람이든 세령이든 그들에게 나의 존재는 무색무취무형의 형태로 잠시 남았다 며칠 뒤면 깔끔하게 잊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내 내가 마주한 모든 이들에게 나를 세령으로 소개하게 되었다.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도 없고, 크리스탈 월드에 오기 전까지는 사람을 만난 지도 몇 년이 되었기에 내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배 령이라는 한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선 더 이상 세령이라는 이름도 쓰지 않게 되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지은 이름에조차 배가 들어가다니. 이런 지긋지긋한 배.


그 때문에 처음 크리스탈 월드에 지원 문자를 보낼 때에도 망설인 것이 사실이다. 나를 하유람으로 소개할지, 썩 내키진 않지만 어쨌든 오랜 기간 써온 하세령이란 이름으로 설명할지, 아니면 또 다른 가명을 만들지. 찰나의 고민 끝에 하세령이라는 이름을 입력했다. 그리고 나는, 잊고 있었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려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상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이 맞다. 이렇게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고,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 예리한 칼날로 마구잡이로 쑤셔놓고도 잊을만하면, 다 나을 만하면 한 번씩 속에서 왈칵하고 핏덩이를 가득 쏟아낸다. 언제 어디서든 그 몸을 숨기고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것.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면 다시 나와서 내 뺨을 스치고 가는 것. 2013년 12월 7일 새벽 5시 8분.


난 입력했던 것을 모조리 지우고 입력칸에 ‘하유람’ 세 글자를 꾹꾹 눌렀다.


ㅎ,ㅏ,ㅇ,ㅠ,ㄹ,ㅏ,ㅁ.


그동안 외면했던 나와 마주할 시간이었다.

아무리 도망치고 부정해 봤자 내 이름은 유람이니까.







사실 나는 노력의 힘을 믿지 않는다. 어른들은 내게 ‘노력’하면 뭐든 이뤄내지 못하는 건 없다고 가르쳤고, 그러니까 뭐든지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자랐고, 종국에는 단 한 번도 ‘노력의 결실’을 일구어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새빨간 거짓말. 세상에 존재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노력’으로 치부한다면 이 얼마나 단순하고 쉬운 일인가. 물론 MZ세대니 뭐니 하면서 본인이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회 탓이니 정부 탓이니 핑계만 대는 건 옳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 진짜로, 왜 신은 내 염원을 절대 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한 번쯤은 들어줄 만하지 않나? 전생에 큰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그냥 이유 없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탓일까? 만일 그렇다면 왜 하필 나일까?


그리고 위선자들이 동기부여랍시고 웃으며 늘어놓는 한 마디-꿈을 꾸세요,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 그 꿈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죄다 멍청한 소리. 그들은 틀렸다. 아주 철저하게 틀렸다. 꿈은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내게서 멀어진다. 나는 이 사실을 이십 구 년 동안 온몸으로 감각했고, 그렇게 어릴 적 품었던 순수한 꿈들은 하나둘씩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다. 유치한 어린애들 장난 같은 허무맹랑한 꿈 타령을 할 나이도 이미 지났지만, 끝내 가닿지 못한 소망들은 나를 자주 아프게 했다. 아빠도 평생의 소박한 꿈을 끝내 이루어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유람선 선장이 뭐라고, 그냥 해버리지, 그깟 돈이 뭐라고, 나랑 같이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꿈을 포기할 만큼 귀중한 가치인가 싶어서 괜히 아빠와 어린 시절의 나를 원망하게 된다. 아빠의 두 번째 꿈인 하나뿐인 딸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 과연 아빠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다. 성공하겠다는 것,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반열에 오르겠다는 것, 꿈을 가져도 되는 자격을 얻는 것. 이름값을 전혀 하고 있지 못하는 인생. 2.5평 남짓한 방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지난 나의 20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바보같이 그걸 다 믿고 있었어요? 어린애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한 마디씩 던지고 가는 걸? 꿈에서 깨어나세요. 세상에 노력으로만 되는 건 없어요.’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브런치북 프로젝트 응모를 위해 잠시 연재를 중단합니다.

쭉 쓰고 초고를 퇴고 끝에 한 번에 다 올리는지라,

의도치 않게 하루에 여러 개를 올리게 되었네요.


저는 앞으로 계속 유람이의 다음 여정에 함께할 것입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실마리들도,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도 너무 많으니 기대해 주세요 @_@


그럼 저는 또다시 열심히 쓰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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