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롤로그 : 세상을 바꾸려면 발가락부터 꼼지락거려라 2

by 류이람

대학생 때 산 헐값의 패딩을 대충 껴입고 언덕을 올랐다. 엄마는 거짓말을 했다. 날이 풀리기는 무슨.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외투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온갖 카페며 식당이 옹기종기 모여든 골목이라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나 많았다. 간만의 외출이라 수십 개의 눈과 마주칠 때면 괜스레 주눅이 들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이곳에서 하는 일 없이 겉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무심코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본격적으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산꼭대기에 심리상담센터를 지으면 장사가 되기는 할까 의문이었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기 직전까지도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헐떡거리며 힘들게 도착한 오르막길 끝엔, 당장이라도 철거 공사가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한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세요?”


초인종을 눌러도 현관문이 꼼짝도 하지 않아 가볍게 문을 두드려 보았다. 1분 정도 기다렸을까. 멀리서부터 따각 따각, 둔탁한 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잇달아 작은 철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통 새햐얀 중년의 여성이었다.


“하유람 씨?”


찰나의 순간이지만 나는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어 내려가는 여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네, 맞습니다.”

“들어오세요.”


나이를 예측하기 어려운 그 여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덩달아 조심스럽게 가게 안으로 발을 디뎠는데, 그녀가 걸을 때마다 뒤로 늘어뜨린 흑발의 긴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여자의 몸에서 까만 것은 머리카락과 두 눈동자뿐이었다. 품이 큰 하얀 코트에 피부는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하얗다 못해 희멀거웠고, 머리카락 중간중간에도 헤어피스를 붙인 듯한 하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지나가다 누구나 한 번씩은 뒤돌아볼 것 같은 수상한 행색이었다.


여자는 본인 차림새처럼 하얀 책걸상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정말 지독한 화이트 마니아군,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거니라며 속으로 짐작하는 사이 여자가 내게 믹스커피 한 잔을 건넸다. 이곳에서의 유일한 흙색이었다.


“감사합니다.”


비록 난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하유람 씨는, 평소에 솔직하신 편이세요?”


여자는 난데없이 이상한 질문을 던졌고, 그러면서 갑작스레 부담스러울 정도로 허리를 숙여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는 동공이 유독 텅 비어 보여 소름이 돋아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도무지 이 여자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통상 아르바이트 면접 때 물어보는 것들-출퇴근 거리는 얼마나 되나요, 이런 일 처음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 따위의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예상했건만,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장은 첫인상부터 지금 이 의미심장한 언행까지 전부 이상했다. 곱게 엘자 홀더에 넣어서 가져온 이력서는 뒷전이었다. 나는 여자와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네. 저는 항상 진실만을 말합니다.”


과거에 봤던 숱한 아르바이트 면접으로 미루어 보아, 저 질문의 의도는 ‘거짓말을 하실 건 아니죠?’, ‘저는 일 못하는 것보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더 싫어요’ 뭐 이런 것임이 뻔했다. 소중하게 얻은 면접의 기회를 놓치긴 싫었다. 이제는 진짜로 무언가를 시작해야만 했다. 사실은 내 안의 진실은 추호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나 자신까지도 속여왔다.


“그럼 합격입니다.”


여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러고는 파일철에 꽂힌 근로계약서 중에서 한 장을 뽑아왔다.


“바로 내일부터 근무하실 수 있나요?”


아직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도 듣지 못했는데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당해 얼떨결에 네,라고 섣불리 대답해 버렸다. 왠지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여자가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제 이름은 젤라입니다.”


이름이 독특하네. 가명인가? 고개를 갸웃대며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소스라치게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바로 손을 떼어버릴 뻔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녀의 투명한 손등 아래로 파란 핏줄이 비쳤다. 아무리 겨울이라 해도 사람 손이 이렇게까지 차가울 수 있나.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이 사장의 정체는 뭐지, 심리상담센터가 왜 이리 수상한 곳에 있지, 진짜 사이비 종교는 아니겠지… 각종 상념들이 어지럽게 머리를 헤집었다. 그 사이 젤라가 종이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읽어보세요.”


나는 종이를 눈앞에 들고 활자 하나하나씩 꼭꼭 씹어 내려갔다.


[크리스탈 월드 규칙]

1. 이곳에서는 모두가 투명해지셔야 합니다.

2. 가능한 한 투명해지세요.

3. 원하시는 만큼 우세요. 휴지와 손수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심리상담센터라 하기엔 너무나 을씨년스러웠다. 수상한 위치와 미심쩍은 옷차림과 꺼림칙한 규칙. 요지를 찾을 수 없는 센터장의 지시. 대충 그럴 법한 핑계를 대서 일하지 못하겠다고 할 심산이었다. 입구 쪽을 곁눈질하며 어떻게 하면 잡히지 않고 빨리 도망갈 수 있을지 궁리하는데, 젤라가 뭔가 기억났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보여드리지 않은 공간이 있었네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젤라가 따라오세요, 하고 손짓했다. 젤라는 2층으로 나를 이끌었다. 계단을 오르는데 펄펄 날리는 먼지 때문에 기침이 자꾸 났다. 2층에는 현관 커튼으로 가려놓은 아치형 입구가 있었다. 쨍한 빛줄기가 커튼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젤라가 들어오라며 먼저 커튼을 헤치고 그대로 사라졌다. 저기 들어가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건 사이비 종교가 아니고 인신매매인가?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투성이 메스를 들고 배를 가르려는 젤라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고민하는 사이 저 너머에서 얼른 들어오라는 외침이 들렸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짧은 심호흡 후에 구멍 속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언제든 바로 도망칠 수 있도록 온몸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커튼 너머의 공간은 뭐랄까, 예전에 세계여행 다큐멘터리에서 본 루브르 박물관 앞 유리 피라미드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온통 유리였다. 바닥도 유리, 벽면도 모조리 유리, 의자와 탁자도 유리, 그 위에 올려져 있는 꽃병은 당연히 유리.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천장에도 크리스탈 유리 특유의 조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 작고 눈부신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팔뚝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1층은 하얀색으로 통일하고, 2층 한 구석은 유리로 도배를 해 놓은 것을 보면 이 사장에 대해 품은 내 의구심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이상한 곳이었다. 그리고 역시 본명인지 아닌지도 모를 젤라라는 여자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내 의심의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젤라는 여전히 입꼬리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설명을 이어갔다.


“익숙해지셔야 해요. 유람씨가 제일 많이 근무하게 될 공간이에요.”


젤라가 엄지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삽시간에 불이 모두 꺼지고 샹들리에 중앙에서 새어 나오는 조명 한 줄기만이 덩그러니 놓인 의자를 오롯이 비췄다. 아무래도 괜히 이곳에 온 것 같다. 나는 도망가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오기로 한 3분 전의 선택을 후회했다. 젤라가 그런 나를 보고 피부만큼이나 새햐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곳은, 크리스탈 월드입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 : 세상을 바꾸려면 발가락부터 꼼지락거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