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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형 May 31. 2024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원이 아버지께>

어제 주목할 만한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세기의 결혼’으로 주목받은 재벌 총수와 대통령 딸의 재산분할 결과입니다. 유책 배우자인 남편이 아내에게 약 1조 3800억을 지급하라고 법원은 판결했습니다. 


여자의 지조는 모든 걸 잃을 때 드러나고, 남자의 지조는 모든 걸 얻을 때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빌 게이츠부터 이재용, 제프 베조스, 일론 머스크 등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인물이 이혼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아요.    

  

게다가 요즘 주위를 둘러보니, 결혼 생활을 지속하지 않겠다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습니다. 모든 걸 잃거나 얻을 것도 없이, 님으로 만나 남으로 헤어지는 게 현실입니다. 다들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요. 그런 세상을 보면서 교과서 속 한 작품이 떠오릅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나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나는 언제나 당신께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는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 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 내 배 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배 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원이 아버지께’라는 유명한 편지이지요. 조선시대 이응태의 부인이 죽은 남편에게 보낸 것입니다. 고성 이씨 분묘 이장 때 발견되었지요.      

 

학창 시절에 이 작품(교과서엔 수필로 분류되어 있습니다.)을 읽었을 땐 ‘참 애틋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에 대한 사랑을 읊은 작품은 많지만, 이 편지처럼 마음에 와닿진 않았습니다. 아마도 개인적이고도 솔직한 편지의 특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젊은 나이의 남편을 잃은 임신한 아내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곳곳에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종이 여백은 모자라 귀퉁이에까지 쓴 걸 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어른이 되어 보니, 이런 사랑이야말로 참으로 귀하고 귀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부부의 연은 전생(前生)에 붉은 실로 이어진다는 데, 지금은 그 실이 너무나 쉽게 끊어져 버립니다. 아예 실이 이어진 상대를 찾지 않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지요.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합니다.      


그 어떤 이도 죽음을 피하진 못합니다. 부와 권력도 무덤으로 가져갈 순 없지요. 대신 제가 죽을 때 원이 어머니처럼 진정 슬퍼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삶은 충분히 가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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