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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형 Jun 19. 2024

어른이 되어 뉴스를 곱게 보지 않는 이유

<개는 왜 짖는가>

요즘 ‘애완견’이 뉴스에 한창입니다. 반려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언론을 ‘검찰의 애완견’으로 비유한 야당 대표의 발언 때문이지요.     


원래 언론에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기레기, 기더기(기자+구더기), 경비견(권력 체제 옹호) 같은 부정적인 것부터 감시견(권력 체제 견제), 등대(사회를 밝히는 존재)라는 긍정적인 것까지요. ‘애완견’(권력 체제 아부)이 이번에 하나 추가된 셈이지요.        


물론 어떤 직업군 전체를 싸잡아 묶는 건 유의해야 합니다. 전체가 아닌 일부의 경우에만 적용되며, 그게 맞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또한 왜 많은 사람이 그 말에 동조하는 지 분명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젊은 순경, 봤지요? 저렇게 자기 허물을 뉘우칠 줄 모르고 큰소리만 치고 있으니 개가 짖지 않고 배기겠소? 정부에서도 충효(忠孝) 어쩌고 했으면, 저런 작자들부터 묶어 가야 할 게 아니요? 그리고 박 기자, 어떻소. 이런 사람을 신문에 안 내면 뭣을 신문에 낸단 말이요?”

  털보 영감이 이번에는 영하를 물고 들어갔다.

  “뭐요? 신문에 내다니, 뭣을 신문에 낸단 말이요?”

  사내가 털보 영감 말을 채뜨리며 시퍼렇게 악을 쓰고 나섰다.

  “임자 같은 사람을 신문에 안 내면 뭣을 신문에 낸단 말이여? 개는 짖으라고 있고 신문은 나팔을 불라고 있는 것인데개도 못 봐서 짖는 일을 신문 기자가 손 개 얹고 있으란 말이여신문 기자가 개만도 못한 줄 알아?”               



<개는 왜 짖는가>의 주인공은 기자입니다. 한때 특종을 여럿 터뜨릴 만큼 유능했지만, 최근 들어 흥미를 잃고 취재도, 기사 쓰기도 시큰둥하지요.      


어느 날 주인공은 동네 어르신들과 한 사내의 말다툼을 목격합니다. 어르신들은 불효자인 사내의 악행을 신문에 내 줄 것을 주인공에게 부탁하지요. 전과 5범인 사내 역시 당하고만 있진 않습니다. 역정을 내면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막말을 일삼지요. 여기서 흥미로운 건 동네 어르신들이 데려온 개입니다.     

      


사내가 좁쌀영감한테 삿대질을 하며 악을 썼다. 순간 왕왕, 셰퍼드가 짖었다. 스피츠와 포인터도 덩달아 짖고 나섰다.

“또철아, 또철아, 가만있어, 가만!”

개들이 다시 누그러졌다.

“방금은 저 개들이 왜 짖은 줄 알아? 제 주인한테 대드니까 짖었어. 개는 까닭 없이는 안 짖어. 사람 못된 것들은 할 소리 안 할 소리 자발없이 씨부렁대지만, 개는 짖을 놈만 봐서 꼭 짖을 때만 짖어. 저 시퍼런 눈 봐. 저 눈으로 사람 못 보는 데까지 훤히 꿰뚫어 보고 꼭 짖을 놈만 찾아 짖는단 말이야.”

털보 영감이 능청을 떨었다.     



개들은 사내를 향해서만 짖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개들이 짖는 이유’는 뭘까요? 불의(不義)를 꾸짖기 위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 갖춰야 할 태도이지요.


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내심 고민하다가 결국 이에 대한 기사를 쓰기로 합니다. 하지만 신문사 편집실에서 기사를 거절당하는 선배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써 놓은 기사를 버리지요. 그날 밤 주인공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다가 순경의 도움을 받아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작품은 끝납니다.       


             




작품 속 주인공이 무기력한 이유는 그 시대와 관련 있습니다. 1979년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곧바로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합니다. 언론이 펜대를 굴리기 전에 미리 펜대를 꺾은 셈이지요. 


신군부는 45개 언론사주들로부터 52장의 각서를 받습니다. 언론사를 조건 없이 포기하고 향후 이 일에 대해 발설치 않겠다는 내용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비판적·저항적인 언론은 탄압당합니다. 결국 신문사 11개, 방송사 27개, 통신사 6개 등 44개 언론매체가 통폐합되고, 정기간행물 172종의 등록도 취소됩니다. 천여 명의 언론인 역시 강제 해직됩니다. 뜻 있고, 의지 있는 언론인들로선 자괴감이 컸겠지요. 반면에 살아남은 언론은 이제 권력의 시녀가 됩니다. 찬양과 미화, 자기검열, 기생, 굴종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요.      

     





전 학창 시절에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학교라는 한정된 곳에서 생활했고, 공부하느라 바빴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했고,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안목 또한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정보를 쉽게 얻을 스마트폰도 없었지요.     


이제 어른이 되어 뉴스를 자주 접합니다. 하지만 곱게 보진 않습니다. 언론은 반성해야 합니다. 작품 속에서 사내의 악행을 신문에 내달라고 요구하는 노인들은 '정의를 갈망하는 국민'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악인에 대한 기사를 결국 쓰지 못합니다. 반면에 ‘사람 못 보는 데까지 훤히 꿰뚫어 보고 꼭 짖을 놈만 찾아 짖는’ 개는 도리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요. 음... 글쎄요. 언론이 개만도 못한 현실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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