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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Oct 27. 2024

귀국, 새로운 축제의 서막

제12장, 고국으로 돌아온 이방인은 지금 (完)

시드니에서 케언즈로 떠나던 비행기에서 내 뒷좌석에 탄 여인이 오열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얼마나 슬프면 저렇게 서럽게 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목 놓아 울었었다. 당시 시드니를 떠나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몇 개월 뒤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과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여정에 대한 기대감에 그날 비행이 딱히 슬프지 않던 나에게 그녀의 울음소리는 완전히 타인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온몸을 떨며 울음을 토해 내던 나를 그녀와 함께 회상하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어떠한 이유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떠날 때의 감정이 제어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좀처럼 우는 일이 없던 내가 한동안 까딱하면 눈물을 쏟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1년의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글쎄, 그건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당시의 감정이 서럽거나 슬픈 것은 아니었다. 내가 호주에서 누리고 온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벅차오르는 것이어서, 그래서 감격에 겨워 울었다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다. 그 비행기에서 지난 1년을 회고하며 하고 싶은 것이 많아 지금 죽으면 아쉽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삶의 여한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었다. 그만큼 많이 행복했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다정한 사람들로부터 치유를 받고,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들로부터 힘을 얻으면서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시간. 그야말로 내 삶을 송두리째로 바꾸어 놓은 호주에서의 1년은 나 스스로 나와 타인 그리고 이 세상에게 온전한 축복을 빌어 줄 수 있게 했다.


더 이상 과거의 트라우마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호주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호주에 오기 전까진 그때의 기억이 불현듯이 떠오르는 순간이면 주저 없이 열다섯의 시절로 돌아가 단번에 울분과 증오심에 휩싸여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 자신을 괴롭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호주에 오고 난 뒤로 더는 그때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그때를 회상함으로써 만들어졌던 분노가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땅에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언어로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단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은 덕분이었을까. 이젠 정말 그때의 아픔이 나의 발목을 잡지 않는 듯하다. ••• 물론 ‘완전히’ 그렇게 됐다고는 죽을 때까지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깊게 파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게 되지만 상처 받았던 순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돌림의 기억과 별개로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한국 사회에 속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여전히 내가 주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곳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 중 대다수는 나에게 결코 적용될 수 없는 것들인 탓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국도 변해 가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국가적 고유성 차원에서 절대 바뀌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제 그 어떤 것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직접 나의 길을 만들어 지나온 길을 지침 삼아 걸어갈 것이라고 다짐했으므로.


비행기에서부터 내가 한국에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시켜 준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내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외투의 지퍼를 올렸다는 것이다. 호주에서는 일할 때 빼고는 거의 브라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 주변 여성 친구들 중 상의 속옷을 착용하지 않는 친구들이 꽤 되었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타인의 복장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 여성’ 자체만으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씁쓸히 현실에 순응했다.


두 번째는 함부로 타인의 몸에 접촉해 오고 사과 한 번 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발견한 것이다. 당시 나는 화장실 대기열에 서 있었는데 뒤에서 한 할아버지가 내 몸을 자신의 몸으로 밀치면서 아무 말 없이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런 식의 무례한 경우는 너무 오랜만에 겪는 것이라 당시엔 말조차 안 나왔는데 그 이후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신체 접촉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면서 내가 다시 한국에 왔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불쾌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도.


내 가족과 친구들이 들으면 속상할 이야기지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진정으로 즐거워질 때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고작 1년 살다가 온 것뿐임에도 어째서 그렇게 호주를 내 집처럼 여기게 됐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는데 한국에 완전히 돌아오고 나서야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됐다. 한국에서 나는 애초부터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라고 언제나 불행한 것은 아니다. 이방인으로서 존재하면서도 그곳에서 자신을 행복케 하는 것을 어떻게든 발견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종국에는 자신을 둘러싼 문화에 결코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상황에 매번 환멸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 몸무게에 집착하는 어린 여자아이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칭찬, 능력이 아닌 외모로 평가받는 여성 노동자들 등 한국 사회의 그 무엇도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했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를 보기 위해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간 날,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는 착각이 일었다. 성형외과로 모든 층이 가득 채워진 빌딩이 내 주변을 둘러쌌고 온갖 상가에는 입시 학원과 부동산이 즐비했다. 지하철에는 결혼 정보 회사 광고가 빼곡했고 길거리에는 비방과 조롱이 난무하는 정당 현수막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날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됐고 그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다들 정말 괜찮은 걸까?


호주에 가기 전까지는 호주로의 이민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호주에서의 생활이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우면 언젠가 그것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정말 그곳에서의 미래를 꿈꿀 만큼 좋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짧고 굵었던 호주에서의 워킹 홀리데이 생활을 마치고 새로 생긴 목표들을 향해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호주에서 지냈을 때보다 더 바쁘게 지냈다. 가장 먼저 해외 취업을 위해서는 전공 지식과 실무 경험을 영어로 익히는 게 나을 것 같아 해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목표를 위해 학교에서 진행하는 해외 파견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알아봤고 그것을 위해 가장 가까운 날에 있는 토익 시험을 준비했다. 영어를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영어 강사 일을 구했고 말레이시아 영어 캠프 교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있길래 곧바로 지원해서 최종 면접까지 통과했다. 때마침 전국 영어 말하기 대회가 곧 열리길래 빠르게 대본을 작성해서 대회 신청을 완료했고 원고 합격에 성공해 지금은 다음 주에 있을 지역 본선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교환학생 면접에도 합격해 1지망으로 썼던 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현재 그 준비 중에 있다. 마지막으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 마무리짓고자 했던 호주 워홀 여정에 대한 글쓰기도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덕분에 예정보다 빨리 끝내게 되었다. 너무 많은 것이 한 번에 몰아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있고, 이 모든 일을 무사히 마칠 것을 분명하게 확신한다. 이따금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질서를 찾을 것이고, 또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Epilogue.



2024년 6월 25일, 오후 12시 40분.


창문 너머로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배와 그것이 남기는 물결의 흔적을 보는데 문득 내가 지나온 길이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고 음미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가장 최근의 순간들이라 근시안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돌아보면 꼭 그 모든 흔적이 보이지 않아도 출발점으로부터 멀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빈아, 우리 정말 멀리 왔구나. 너무 멋지게도.


수많은 실패와 극복의 배경이 된 케언즈에서

수많은 불안과 희망의 배경이었던 시드니로 마침내 돌아가던 날,

비행기에서 열심히 끄적인 일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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