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둔다는 말을 못 해서 계약직만 다녔다

일찍 일어나면 죽고 싶다(4)

by 고온

1년 열두 달 중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있다. 바로 연말이다. 12월이 가까울수록 기쁘다. 쌀쌀할수록 쓸쓸할수록 더없이 기쁘다. 절정이 있다면 12월 25일일 것이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묘하게 들뜬 분위기는 축제 당일보다 설렌다. 축제가 끝나고 난 뒤의 일주일은 일요일 밤처럼 미지근하다. 종소리와 함께 다가온 1월 1일은 새로운 해에 대한 설렘보다 다시 시작된 365일, 살아갈 날이 잔뜩 남은 지겨운 숙제로 다가온다. 내가 끝내지 않아도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린다. 모래시계를 돌리고 숨죽여 기다린다.


대학원 생활은 조교로 시작했다. 가족에게서의 독립,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 시작할 마음이었다. 기숙사에 들어갔고, 2인실에서 지냈다. 좁은 방에서의 다른 생활패턴으로 조금씩 불편함이 생기고 있었다. 조교로 지내고 있었기에 평일에는 밤늦게까지 학과 사무실에 남았고 주말에도 출근해 최대한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학생들의 개인톡과 몇몇 클레임, 편안한 내 공간이 없던 불안함에 조교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만두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다.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사회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그렇게 취업했다. 오래 일하고 싶지 않았기에 계약직만 찾아봤다. 애초에 사회초년생의 선택지에도 계약직이 대부분이었다. 6개월 계약직이었다. 대학원이 있던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금까지 살아본 적 없는 지역이었다. 급히 집을 구했다. 영상통화로 집을 보고 들어갈 정도로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사기를 당하진 않았다. 저렴하고 벌레가 좀 꼬이고 빛이 잘 안 드는 집이었다.


어쩌다 보니 자취도 하게 됐다. 건강을 챙긴다고 샐러드를 배달시켜 먹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집 앞에서 짬뽕탕수육 세트를 먹어 살이 찌고 처음으로 피부관리도 받아보고 마라탕도 자주 시켜 먹었다. 주말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본가에 갔다가 하루 자고 집에 돌아와 티브이를 보다가 잠들었고 다음날 다시 회사를 가는 생활을 했다. 돈을 벌어 매달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가벼운 사치를 부리고 컴퓨터 앞에서 골을 싸맸다. 첫 회사 생활인 만큼 실수도 하고 사수에게 혼나고 자책하고 다시 실수하고 혼났다. 그런 평범한 생활이 6개월간 이어졌다. 12월 31일이 마지막 계약일이었다. 눈이 내린 새하얀 길을 폭삭폭삭 밟으며 연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12월이 되자, 계약을 연장하자고 했다. 이건 예상치 못했다.


정해진 마지막이 있음에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내 입으로 끝내는 게 두려워 계약직으로 시작했는데 계약을 연장한다니, 아차, 싶었다. 그런데 곧바로 부모님이 좋아하실 거라는 생각이 퍼졌다. 나를 좋게 봐주셨으니까 계약을 연장하자고 하셨겠지, 더 일하면 부모님이 기뻐하시겠지, 효도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계약을 연장했다.


그날부터 힘들기 시작했다. 이 계약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난 언제 끝낼 수 있는 거지? 나한테 솔직하지 못한 선택은 나를 점점 짓눌렀다. 효도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내 감정을 덮어버렸다. 누구도 맡겨놓은 적 없는 효도였다. 스스로 손을 뻗어 집은 책임감이었다. 4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정신과와 상담을 다녔다. 이 일만 끝나면, 바쁜 시기니까, 퇴사를 말하는 디데이는 점점 미뤄지고 있었다.


퇴사를 말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으니까.

몸이 엄청 아파서, 출근길에 사고가 나서, 가까운 사람이 죽어서 그래서 출근을 안 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퇴사를 입 밖으로 내뱉는 압박감이 그 정도로 크다. 나만의 작은 세상은 상상도 빈곤했다. 비교할 수 없는 두 가지가 그렇게 비슷해 보일 때도 있었다. 지나고 보면 홀린 것처럼.


마침내 내 입으로 끝냈다. 참고 참다가 터지는 퇴사의사는 순간 짜릿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퇴사 사유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그만둘 때는 공부하기 위해서였는데,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거짓된 명분과 합리화가 반복되었다. 나름 틀을 깼다고 생각했는데, 멀리 돌아온 큰 틀이었다.


끝나가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나는 끝내려고 태어났나 보다. 그럼에도 끝낸다는 말을 꺼내는 게 두려워 다시 계약직을 전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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