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나를 정의할 단어가 없어졌다

일찍 일어나면 죽고 싶다(2)

by 고온
자아가 비대하고 통통하여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여느 날처럼 잠이 오지 않던 밤, 세월이 흘러 펜을 다시 잡기로 고민했던 밤, 앞으로 무슨 글을 쓸지 뒤척이다 번뜩 스쳐간 끝나지 않은 문장에 얼른 핸드폰을 켰다. 회사를 나오면 잔뜩 글을 쓸 줄 알았는데, 더 이상 글이 필요 없어졌다. 글이 없는 채로의 나도 괜찮았다. 최후의 아침을 맞던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떠났고, 편안에 이르렀으며, 간사하게도 배불렀다. 그러나 영원히 머물 수 없었고 상황은 변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잊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완전히 잊지 못했다. 글의 맛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브런치를 처음 가입한 때가 떠올랐다. 그 해는 처음 대학원에 들어가 처음 계약직 직장인이 되었고 본가와 거리가 멀어 자취도 처음 시작했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가득한 해였다. 직장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과연 직장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나도 남들처럼, 남들 같은 수순으로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가능성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왜 아직도 특별한 사람이 못 되었지?



어릴 적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비대한 자아는 성인이 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김이 빠져 날씬해지기 마련인데, 왜 나는 여전히 자아가 비대하다 못해 통통한 것인가. 자의식 과잉인가, 가난하다면서도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나 점차 일에 적응이 되자 이것저것 배우기 모드가 발동되었다. 운동도 하고 싶고, 내일 배움 카드로 자격증도 딸까 싶고, 그렇게 회사에 관련된 키워드를 검색하다 우연히 브런치 글을 만났다.

브런치 심사에 통과하면 작가가 될 수 있다


적게나마 돈을 벌자 이젠 자아실현도 해볼까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가 도졌다.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어 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 어렸을 때 하고 싶었는데 못 해본 일. 평생 한 번도 못 하고 죽으면 후회할 만한 일.

가수, 라디오 DJ, 작가, 프리랜서


돈 한 푼 안 들고, 당장 지금 할 수 있는 일. 쓰기 시작했다. 나를 드러내는 게 부끄러워 창작이라는 가면을 쓰고 하루 몇 편씩, 적어도 주 1회씩 연재했다. 글의 막바지로 갈수록 다음 이야기가 떠올랐고, 구상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법을 자연히 익히게 되었다. 그렇게 완결 낸 글로 인디자인을 배워 책의 틀을 만들어봤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늘 전전긍긍했는데 처음으로 이렇게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의 나는 그랬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나는 중학생 때의 나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덜컥, 상사의 표정에 심장이 덜컥, 두근두근은 더 이상 로맨스의 신호가 아니었다. 정신과에서 불안장애 약을 처방받았으며 퇴사 키워드가 들어간 글들을 모조리 읽었다.


결국 10개월 만에 퇴사했다. 당시 수업이 있는 날은 다른 지역의 대학원에 수업을 듣기 위해 반차를 써서 시외버스를 타고 학교 수업을 듣고, 자취집 쪽으로 기차가 없어 ktx를 타고 본가로 와서 시외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음 해에는 논문도 써야 했고 학교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회사를 나왔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회사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걸.



학생이라는 신분 뒤에서 방황하고 나태했다. 그러나 학생마저 곁을 떠나자, 숨을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해했다. 불행히도 나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고 싶어 했으며,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불안에 떨었다. 나라는 나체는 이리도 부끄러운데 가릴 천조각조차 없었다. 나는 그만, 나를 소개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도를 배웠다. 유도 기술을 배우고 대련하면서, 가족보다 가까이서 중학생 남자애들과 부대끼고 서로의 땀냄새를 맡았다. 낯설지만 즐거웠다. 도복에 살이 쓸리고 멍자국이 빠지지 않아도 건강해지는 느낌은 어떤 동기부여보다 강력했다. 그럼에도 늘 운동을 나가기 직전까지 갈까 말까, 고민했다. 운동 시작 전의 귀찮음보다 발목을 잡는 건 타인의 순수하고 불편한 호기심이 무서워서였다.

학생이에요? 아르바이트해요? 그럼 지금 뭐 하고 있어요?


무슨 일 하냐고 물어볼까 봐. 내 머릿속은 현실에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재생했다. 상상 속의 나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실도 아닌 여러 답변을 내놓았고, 사람들은 꼬리를 물어 질문했다. 나는 늘 말문이 막혀 당황했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거짓말로 대충 둘러대건, 사실을 말하건 사람들은 신경조차 안 쓴다는 걸. 그럼에도 솔직하고 싶은 것은 잘 만든 가짜보다, 어설프더라도 진짜로 살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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