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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온 Nov 11. 2024

퇴사도 4주의 조정기간이 필요해?

일찍 일어나면 죽고 싶다(1)

그럼 4주 후에 뵙겠습니다.

아, 사랑과 전쟁이 끝났다. 신구 아저씨의 유행어이자,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들었던 대사였다. 오른쪽 상단에 붙은 19라는 딱지가 어린 나의 호기심을 더 유발했을지도 모른다. 실상 케이블 TV 재방송으로도 계속 재방영되어 초등학생들도 많이 시청한 방송이었다. 결혼이 늘 행복하지는 않구나(엄마 아빠를 보고 느낀 것과 별개로), 결혼뿐만 아니라 이혼도 있구나, 이혼을 하기 위해선 4주의 조정기간이 필요하구나 세 가지의 교훈을 준 방송이었다.




"저 자퇴하고 싶어요."

열여덟이었다. 학교에 자퇴의사를 밝히니 4주간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선택이 맞는지, 후회하지는 않을지 4주간 고민해 보라는 시간이었다. 맡은 지 2개월밖에 안 된 반에서 자퇴를 하겠다는 학생이 나왔으니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놀라셨을까, 처음에는 설득하려고 하셨다. 하지만 의사도 완강하고 검정고시 계획도 있다고 말씀드리니, 4주가 아니라 일주일 만에 자퇴 희망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싶습니다."


도의적인 기간을 앞두고 선임에게 말했다. 오늘은 말해야지, 말해야지, 조금만 건드리면 톡 하고 튀어나올 것 같은, 막상 꺼내려면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그 말을 드디어 게워냈다. 혹시나 나를 붙잡을까 걱정했던 몇 달이 무색하게도 선임은 알겠다는 말만 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업무도 그대로였다. 얼떨떨하기도, 속 시원하기도 했다. 그만둔다는 말이 입 밖으로 떠나자 회사는 이미 옛 곳이 되어있었다. 마음은 벌써 떠났는데 몸은 곧바로 떠날 수 없었다. 내 자리를 대체할 직원을 구해야 했으니까. 사회인으로는 알겠지만, ‘나’라는 사람한테 4주의 조정기간은 필요 없었다.


tvn에서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를 봤다. 처음에 제목을 듣고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곡이 떠올랐는데, 실제로도 곡을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로, 펜싱을 하던 나희도는 IMF를 맞아 학교 펜싱부가 해체되고, 풍족하게 살던 백이진은 IMF로 인해 아버지 사업이 부도를 맞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희도는 이진과의 관계를 정의하고 싶어 한다. 우리 무슨 사이야? 남들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사이는 우리가 정의 내리면 돼. 한강 위에 뜬 무지개를 가리키며, 나는 우리 사이를 무지개라고 할래. 이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무지개는 필요 없어."

직구를 꽂는다. 로맨스라는 카테고리로 볼 때는 설레는 대사였을 텐데 나는 그저 부러웠다. 본인의 감정을 알고 분명히 표현할 수 있음에.


나는 까다롭고 민감하고 어설펐다. 회사를 나와도 살아가야 하고 남들에게 지옥이 아닌 곳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만둔다고 별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회사에서의 내 영역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몸을 구기고 말아 접어야 겨우 들어가는 자리. 행여 발가락이라도 빠져나오면 혼났다. 위축되었다. 나는 계약직이고, 다른 사람들은 정규직이었다.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취급은 달랐다. 말수는 적어지고, 개인적인 말을 할까 봐 고르고 골랐다. 회사 사람들은 운이 좋게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적당히 차가웠다.


전날 밤부터 예열된 마음은 출근할 아침이 오면 잔뜩 달궈져 있었다. 눈을 감는 밤이면 새로운 내일은 잘 살아봐야지, 벅차올랐지만 막상 새로운 아침이 오면 죽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죽고 싶었다”. 그럼에도 몸은 관성적으로 출근 준비를 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유튜브로 긍정 명상을 틀어놓고는 눈을 감았다. 긍정적인 말소리는 귀를 맴도는데 머릿속은 “죽고 싶다”만 되뇌고 있었다. 당장 회사에게 오늘 내 하루를 맡기는 게 아까웠다.


오늘은 그만둔다고 말해야지, 수없이 고민했다. 그럴 때마다 오늘의 운세를 켰다. 오늘 퇴사하기 좋은 날인가? 내뱉고 후회하면 어떡하지. 운세로 듣고 싶은 말을 들어도, 못 들어도 퇴사하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오늘은 또 어떻게 버티지? 사무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잘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철렁,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정신과를 가야겠다. 불안장애로 보인다고 했다. 약은 3번 바꿨다. 그나마 심장이 덜 뛰는 약을 찾았다. 긴장감을 낮추기 위해서 반대로 둔감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예민한 손끝으로 잡아야 하는 돌이 있는데, 도톰한 장갑을 껴서 돌의 거친 표면이 느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나는 도망쳤다. 퇴사하기 좋은 운세는 없었다.


나는 지금 퇴사하고 싶어, 운세는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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