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빌런은 없다(6)
취한 김아람. 무장해제된 모습으로 박현빈에게 몸을 맡긴다. 박현빈은 그런 김아람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한 미모다. 가끔 지나치며 볼 때마다 물컹했던 그때 그 느낌 때문에 홀로 불끈했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김아람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본다. 매력적이다. 키스하면 뭐라고 할까. 내가 미친 것 아닐까. 이제 다 결혼해서 얘들까지 낳았는데. 이제 20대 풋내기들이 아닌데 말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는다.
언제 눈을 떴는지 김아람이 그런 박현빈을 보고 있다. 무안했는지 한잔 더 하자고 제안한다. 박현빈은 거절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 김아람의 집 앞 치킨 집에 앉은 두 사람. 박현빈이 말한다. “그때 기억나세요. 선배가 환영식 때 춤추자고 한 거. 그날 밤 자취집에도 데려가셨잖아요. 라면 끓여주시고. 전 그 라면이 지금도 생각나요. 제일 맛있던 것 같아요” 김아람이 흐릿해진 눈을 들어 박현빈을 쳐다본다.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눈빛이다. “현빈 씨 바보 아닌가요. 그때 먹은 라면이 무슨 뜻인지 정말 몰랐다는 건가요.”
박현빈은 회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 김아람은 아무 말 없이 박현빈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신촌에 있는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대치동 부모집을 놔두고 ‘독립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얻은 방. 말이 자취방이지 스튜디오 형식의, 당시로서는 한마디로 번쩍번쩍한 원룸이었다. 김아람은 박현빈에게 맥주와 안주를 내고, 라면도 끓여 주었다. 그리고는 ‘왜 이렇게 갑자기 취하지’라며 침대에 피식 쓰러졌다. 박현빈은 그때 미친 듯이 뛰던 가슴의 박동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김아람이 저러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냥 집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박현빈은 그 후로도 계속 생각해 왔다. 가수 싸이의 ‘어땠을까’(feat. 박정현) 가사처럼.
내가 그때 널 (내가 그때 널)
잡았더라면 (잡았더라면)
너와 나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마지막에 널 (마지막에 널)
안아줬다면 어땠을까 (어땠을까)
오늘도 마찬가지다. 김아람으로부터 이런 말까지 듣고 나니 더 그렇다. 그 라면이 무슨 뜻인지 몰랐냐는 핀잔. 자신의 진심을 왜 받아주지 않았으냐는 질타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러나.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다. 인생에서 가정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그날 박현빈이 김아람에게 키스했다면, 함께 살을 비볐다면 둘은 어떻게 됐을까. 사실 그때 말고도 김아람과 더 친해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김아람은 항상 그를 보고 있었고, 그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관계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박현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강남 부잣집 딸로 태어나 천방지축인 데다 술만 마시면 주사酒邪가 심한 김아람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또 그녀 주위에 항상 넘쳐나는 남자들도 마뜩잖았다. P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쉽기도 했지만, 오히려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김아람과의 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묻기로 했다. 그렇게 십수 년을 김아람의 일은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추억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쩌자는 것인가. 지금 와서 그때 얘기를 한들 다 무슨 소용인가.
김아람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박현빈이 한 번만 따로 전화를 하거나 약속을 잡자고 했다면 역사는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 총명한 머리, 진중한 자세. 박현빈은 김아람의 ‘워너비’ 남자 친구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저돌적으로 용기를 내서 대시한 건데. 집에서 반대가 있더라도 설득하고 일을 밀어붙일 결심까지 했던 건데. 박현빈은 끝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보같이. 그렇게 많은 시그널과 기회를 줬는데 흘려버린 것이다. 괘씸하고 모욕적이었다. 그래서 미워도 했지만, 역시 박현빈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갖지 못해서 더 안타까운 게 인지상정일까. 그래도 이런 얘기까진 털어놓지 못한다. “네가 그때 한 번만 반응했다면 너한테 시집갔을 거야”라고. 대신 입을 다문다. 그녀 역시 20년 전 자유분방한 천방지축이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둘은 그렇게 말이 없다. 애꿎은 술잔만 기울인다. 과거는 아쉽지만, 그렇다고 돌이킬 수도 없는 것.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말은 안 하지만 그 순간 둘은 느낀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과거는 지나갔지만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걸. 20년 뒤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 이제 알 건 알고, 해볼 것도 충분히 해 본 나이다. 뭐가 두렵고 아쉬울 것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평생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당일 두 사람의 수상한 분위기를 줄곧 곁눈질하던 호프집 사장님의 후일담은 이렇다. 1시간 넘게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두 사람이 어느 순간 불꽃같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홀연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침 그날 밖에는 더위를 식혀주는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새벽 거리. 흐릿한 가로등 불빛. 우산도 없이 비 오는 거리를 손잡고 걸어 나간 두 사람. 서로를 보며 웃으며 다정히 걸어가던 두 남녀. 호프집 사장은 아직도 그날 목도한 중년들의 로맨스 현장을 생각할 때면 부러움과 아쉬움으로 셔터 내린 홀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끝.
사진 출처=엑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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