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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11. 2023

썸만 20년째①

오피스빌런은 없다(6)

       

박현빈과 김아람은 소위 ‘썸’을 타는 사이다. 벌써 20년째다. 한 회사 다니면서 선후배로 그렇게 지내고 있다. 서로 호감이 있지만 손 한번 잡은 적이 없다. 회사 간부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20년째 썸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인가 발인가. 뭐든지 빠른 요즘 MZ세대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본인들도 이상하게 생각한다. 저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도 다 미스터리라고 말한다.      


 둘이 엮이게 된 것은 박현빈이 회사에 들어온 직 후다. 환영식을 가졌고, 1차 식사에 이어 2차로 시내 L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에 갔다. 그 자리에서 3년 선배인 김아람이 신입인 박현빈에게 다짜고짜 부르스를 추자고 했다.(당시엔 회사 동료들끼리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더라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이라 생각하고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김아람은 신입으로 들어온 박현빈을 보자마자 ‘귀엽고 참신하다’며 남자 친구 후보로 찍었다. 다른 여자 동기들에게 “쟤는 내 거니까 침 흘리지 말라”라고 경고까지 했다. 워낙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데다 그럭저럭 동갑내기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아 다들 잘해보라고 응원했다.      


 박현빈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예상치 못한 김아람의 춤 신청에 처음엔 내심 놀랐다. 그러나 내빼거나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선배의 청 인 데다, 사내에서 손꼽히는 미인 아닌가. 거절할 이유도 없다. 불감청이 고소원이라고나 할까. 박현빈은 김아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하는 우렁찬 복창 소리와 함께 플로어로 튀어 나갔다. 여기저기서 ‘오우’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둘은 그야말로 ‘찐’하게 춤을 췄다. 김아람이 리드했다. 후배인 박현빈의 목에 손을 착 감고 밀착했다. 술이 좀 취했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도발적인 유혹이었다. 술자리를 같이 했던 동료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러다 오늘밤 무슨 일어나는 거 아냐”. 다들 아슬아슬한 풍경에 걱정반, 기대반 하는 눈치로 사태를 주시했다. 일부에선 김아람의 행동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이도 있었다. 그동안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나이 먹은 노총각들이었다.      


 박현빈은 내심 이런 상황이 싫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대놓고 반응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차츰 자제력을 잃어갔다. ‘술도 취했겠다, 에라 모르겠다’는 식이 됐다. 용기를 내 손에 힘을 주고 김아람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골반이 빈틈없이 밀착됐다. 댄스 플로어 여기저기서 휘파람과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 상태서 그룹 웸의 ‘careless whisper’ 한 곡이 다 흘러갔다. 무아지경의 두 사람. 박현빈은 손에 땀이 흥건하고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박현빈은 곧바로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먼저 화장실로 뛰어갔고, 김아람이 약간 비틀거리다 뒤따라갔다. 취했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머쓱한 짓을 했는지 곡이 끝나자마자 깨달은 것이다. 요즘 시쳇말로 현타(현실 지각타임)라고나 할까.       


 문제는 둘 사이 관계가 딱 그날까지였다는 것이다. 그 후 저녁을 같이 한다거나 따로 만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사내에서는 곧 무슨 소식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서먹서먹했다. 김아람은 남자인 박현빈이 먼저 연락해 주기를, 박현빈은 첫날 그랬던 것처럼 김아람이 한 번 더 불러주길 기다렸다. 그렇게 6개월, 1년이 갔고, 다시 2년이 됐다. 그 사이 둘은 각기 따로 연애를 시작했고, 결국 각자 다른 짝을 찾아 결혼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내 통신망에 따르면, 둘은 술자리에서 간간이 서로의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김아람은 박현빈에 대해 “박현빈 걔, 좀 귀엽지 않냐” “요즘 누구랑 사귄대”등을 물었고, 박현빈은 김아람에 대해 “일은 무슨, 언제 적 얘긴대” “그래도 회사에서 제일 예쁘긴 하지”라고 남 얘기하듯 했다. 그러나 둘 다 마음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부르스 사건은 이제 모든 사람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힌 듯했다.       


 두 사람 간 스캔들이 다시 불거진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김아람은 딸을 낳았고, 박현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둘은 여전히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르스 사건은 ‘치기 어린 어릴 적 해프닝으로, 추억으로 안고 가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두 사람이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부서장이 된 김아람과 바로 밑에서 그녀를 보좌하게 된 박현빈 차장. 두 사람이 같은 부서에 배치되자 사내 분위기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물론 어린 직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당시 나이트클럽에서 아슬아슬한 순간을 지켜본 노땅들, 꼰대 간부들만 당시 사연을 기억해 냈다. 이들은 복도나 흡연실, 저녁 술자리 등에서 두 사람의 과거사를 소환했다. ‘그때 정말 위험했었지’ ‘그래도 희한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둘이 한 부서에 둬도 되는 건가’ ‘저러다 또 일 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고 갔다. 물론 잡담 수준이고 술자리 안주거리였지만, 실제로 뭐라도 나와 주기를, 그래서 삭막해진 회사 분위기를 오랜만의 핑크빛 불륜소식으로 후끈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짓궂은 일부 극성층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김아람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시작했다. 부서 회식 때 거나하게 취한 김아람이 갑자기 “이 자리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소리친 것이다. 막내 사원은 입에 물고 있던 맥주를 그대로 테이블 위로 뿜었고, 몇몇은 겨우 고개를 돌려 컥컥 댔다. 40대 후반 유부녀 여성 간부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동년배인 박 차장 밖에 없는 상황. 더구나 그 부서는 아마조네스 군단으로 불리는 여초 부서다. 유일한 홍일남에게 시선이 일제히 쏠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당황할 박현빈이 아니었다. 초년병 시절 김아람의 손에 이끌려 말 그대로 ‘부르스를 당하던’ 풋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른 베테랑, 능구렁이가 다 된 박현빈. 그는 “어이쿠 부장님, 잘 부탁한다는 소릴 이렇게 대놓고 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잘 보필하겠습니다”라고 눙을 친다. 그러면서 “니들도 부장님 잘 모셔야 한다. 자, 거국적으로 원샷”. 그렇게 아슬아슬한 자리가 정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겨우 정리됐던 분위기는 귀가 동선을 놓고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박현빈을 빼고는 김아람과 집 방향이 모두 정반대여서 두 사람이 같은 택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렇다고 술 취한 부장을 놓고 따로 가겠다고 할 수는 노릇이고. 박현빈은 어쩔 수 없이 “부장은 내가 모실게”라며 택시를 잡는다. 이미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한 김아람을 박현빈은 거의 끌어안듯이 잡아서 택시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 광경을 보는 직원들이 ‘오호’ ‘어머머’ ‘멋져요. 박 차장님’라는 등 기대 어린 응원을 보낸다. 그런 여자 후배들의 눈길을 뒤통수로 받으며 둘은 집으로 출발했다.


       

2편에서 계속


이미지=엑스포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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