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퇴사의 목적이 이직도 창업도 아닌, "쉼"이었던 만큼 이것에 충실했으니 너른 마음으로는 휴식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공이냐 실패냐를 기준으로 생존과 도태를 반복해온 평범한 인간의 시선에서 본다면 남들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미적지근한 일상이다.
기존 버티기의 기록까지 합하면 총 40편이 넘는 퇴사 관련 이야기를 써왔는데, 한편당 소요 시간을 2시간이라고 가정할 경우(나는 글을 그다지 빨리 쓰지 못하는 편이라서, 품이 많이 든다) 80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별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에 투자한 것일 수도 있다.
소위 남들이 궁금해하는 직업을 거치지도 않았고 독특한 이력도 없다(공기업 경력이 있으나 퇴사기의 소재로서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폭삭 망했다가 불굴의 의지로 일어선 '끝내 이기리라"와 같은 스토리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늘, 적당히 망했다가 적당히 살아났다). 직무가 자주 바뀐 탓에 얇은 전자책으로 담아낼만한 제대로 된 노하우도 없다. 관리자 경험은커녕 사모임의 리더조차 맡지 못한다. 아니, 어딜 가나 존재감이 희미하다.
나의 퇴사기는 '회사원으로서' 매력이나 흥미로운 구석 하나 없는 인간이 평범하게 직장을 그만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누가 관심이나 있겠냐고요.
하지만 현타도 잠을 자고 일어나면 매일 리셋되는가 보다. 글이나 쓸까 싶어 궁둥이를 붙이고 앉으면 퇴사 이야기가 끝말잇기처럼 이어진다. 정발산 -> 산기슭까지 갔으면 이미 막다른 골목인데 슭곰발이라는 말이 있단다. 쥐구멍 만하게 솟아난 공간으로 빠져나와 다시 네버엔딩 스토리가 된다.
여전히 소재가 계속 튀어나오고, 한번 더 사골 국물을 우려먹고 싶은 날도 있다. 버젓한 글의 형태는 아니지만 일기장 한켠에 숙성시켜 놓은 글감 반죽으로 수제비라도 만들어볼까 싶고, 어제 만든 카레 요리를 오늘 또 찾게 되듯 같은 주제를 이어서 써보고 싶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강렬한 색채도 쨍한 향기도 없는 이 뜨뜻미지근한 퇴사기를 공개된 공간에 계속 쓰고 있는 것일까?
도서관에서 대출한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단숨에 읽어버린 날, 다음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되었다.
이 상에 선이 늘어나는 것은 역사에 남지 않을 사소한 많은 행동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더 나쁜 세상에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의 절반쯤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충실하게 살다가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서 잠든 이들 덕분이다. <미들 마치>, 조지 엘리엇 (숲속의 자본주의자 인용)
나는 내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 딱 그만큼의 인생을 지향하고 있다. 특별히 성공하고 싶지도, 남다른 영향력을 미치고 싶지도 않은 부류의 인간인 만큼 드러나지 않고 보통적으로 살아가길 희망한다. 그러므로, 애써 특별한 경험을 쌓고 특출 난 이력을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건 나의 본질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성정을 '세상이 살만한 이유의 절반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 덕분'이라는 논리에 빗대어 생각해보니, 내 이야기도 결국은 더 나쁜 세상이 되지 않기 위해 공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합리화에 당도하게 되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선을 이룬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악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약하나마 의미를 찾았으니 쓸거리가 남아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 퇴사기를 이어갈까 한다.
어딘가에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버티지도 나오지도 못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면,
혹은 만신창이가 되거나 번아웃을 겪은 후 개인의 삶이 더 소중해졌다면 부디 나의 퇴사기를 통해 공감과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