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제가 퇴사한 걸 모르십니다

어머니 전상서

by 소소라미

며칠 전, 남편이 어머니와 함께 추석 맞이 벌초를 가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벌초 복장(누리끼리하고 허름한 20년 된 셔츠와 당장이라도 무릎이 발사할 것 같은 10년 된 츄리닝)을 갈아입고 있는 에게 긴히 부탁할 것이 있노라 했다.


"오늘 어머니한테 나 퇴사했다고 말 좀 해줘. "


퇴사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여태 이 사실을 모르시는 어머니께 죄송한 터였다.


배려심 깊은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뜬금 전화를 하는 대신 이틀에 한번 꼴로 아들에게 안부전화를 하신다. 기념일이나 특별한 일을 앞두고 있지 않다면 내쪽에서 뜬금 전화를 드리는 일도 거의 없다. 이런 적정한 거리두기는 15년 이상 고부간 갈등이 없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따라서 내가 대뜸 전화해서 퇴밍아웃을 하는 건 우리의 공존과 평화를 위협함은 물론, 고부간 법도에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합리화 중. 사실은 용기가 없어 입이 떨어지지 않는 상황임)




남편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한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 남편이 2년 반 전에 퇴사할 때 친정에는 내가 대신 퇴사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기브 앤 테이크 원칙을 지키고 싶었다.


결혼 후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남편과 나는 불필요한 오해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각자의 부모에게 각자 효도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따라서 부모님과의 상의 없이 감행하는 퇴사가 불효라면, 친정에 대한 불효는 내가 감당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기억으로는 남편이 퇴사하기 2달 전쯤 말씀을 드렸던 것 같다. 퇴사 후 3개월 정도의 휴식기를 갖고,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설명드렸다.


"멀쩡한 회사를 왜 그만두냐?"는 반응일까 봐 우려했으나, 감사하게도 당신들은 "우리 둘째 사위"라면 자영업도 잘 해낼 것 같다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둘째, 어머니가 가끔 나와 통화할 때마다 회사에는 잘 다니냐고 물으셨을 때, 최근까지도 태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궁금해하실 때마다 징징대면서 나약한 모습을 좀 보였어야 했는데, 무슨 자존심이었는지 회사에서 나름 잘 나가는 척 허세를 부렸다.


뭐, 간헐적이긴 하나 팀 내에서는 일 잘러로 통하기도 했기에 그 부분을 조금 더 부각시켰을 뿐이다(뻔뻔하군). 무능한 상사라는 생각에 팀장을 존중하지 못하고 업무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해서 내적 갈등을 심히 겪긴 했어도, 성과나 역량을 이유로 낭떠러지로 몰리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밑밥을 좀 깔아 둘걸. 꾸역꾸역 다녀온 걸 모르시는 어머니 입장에서 "퇴사했다"라는 한마디는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일 수 있겠다.


당분간 아들 혼자 돈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 남들 다 하는(절대로 모두 다는 아니다! 삶의 방식은 다양한거다) 맞벌이를 하지 않는 상황, 며느리가 더 이상 알만한 회사에 다니지 않는 상황, 아들 식구가 먹고살만한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당신 입장에서는 잽, 훅, 어퍼컷, 스트레이트 등 각종 형태의 공격이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오는 격이려나.


마지막으로, 남편이 2년 반 전에 퇴사했을 때 어머니가 실제로 앓아누우셨기에 그나마 핏줄인 남편이 전하는 게 나을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


지난해 추석, TV에서 흘러나오는 임영웅 노래를 들으며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쟤가 갑자기 회사 그만둔다고 했을 때, 너무너무 속이 상해서 3일 밤낮을 누워 있었는데, 우리 영웅이가 나를 위로해 주더라. 그때는 아들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어."


당신이 오랜 세월 장사를 하면서 힘들게 자식들을 키워온 영향인지, 어머니는 회사원이라는 우리 부부의 직업을 흡족해하셨다.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나름 안정적이었던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신 적도 있다.


"자식 걱정 안 하게 해 줘서 고맙다."

이 말이 귓가에 맴돌수록, 퇴사했다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이제 나는 어머니가 걱정하는 "안 고마운 자식"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다.




벌초하는 날, 남편은 끝내 어머니께 나의 퇴사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상황 봐서 운을 띄우려 했으나, 어머니가 만나자마자 "며늘아기는 출근했냐?"라고 대뜸 물으셔서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는 거다.


어쩐지 그날 내가 남편 대신 매장 문을 열고 이런저런 걸 물어볼 때마다 손으로 수화기를 가리고 조심조심 받는 느낌이 더라니.


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고, 화력은 더 세졌다. 결국 이번 추석이 고비가 되었다.


차례상을 앞에 두고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씀드리는 건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차례상을 치우고 나면 도란도란 앉아 과일을 먹으면서 임영웅이 나오는 채널을 보실 텐데, 갑분 퇴사라니 당신의 꿀 떨어지는 얼굴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 아닌가.


아직 이틀 남았으니 정공법을 할지, 좀 더 세를 규합하여 때를 도모할지는 차차 생각해봐야겠다. 퇴사의 이유는 차고 넘치기에 설명하면 분명 이해해주실 거라 믿지만, "퇴밍아웃"자체는 불혹의 며느리에게도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혹, 어머니가 이 글을 보신다면 부디, 못난 쫄보 며느리를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어머니 전상서

어머니, 사실 제가 지난달에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다른 좋은 곳으로 이직했으면 좋았겠지만, 저는 더 이상 회사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재미있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 회사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하루 종일 직장에 메여 사는 삶은 이제 그만 졸업하려고요. 20년이면 충분하고, 또 잘 버텼다고 생각해요.
다만,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멋대로 결정하고, 결단해서 죄송한 마음이에요.
속상하시더라도 이해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저를 응원해주셨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저는 여전히 어머니가 야무지고 똑똑하다며(?) 예뻐하시는 그 며느리거든요. 그러니 부디 저의 인생을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올림


+) 이 글에 임영웅 해시태그를 달면 보실 수 있으려나?(일전에 임영웅 글을 올렸더니, 검색어로 유입된 분들이 좀 있었음) 아니면 임영웅 사랑해를 100번 써드릴까? 차라리 손글씨로 써서 가져다 드릴까?


이 화려한 서스펜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