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다 보니 익숙하고 편안해져 절로 좋아하는 감정으로 발전한 것일 뿐,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호감이 생긴 건 아니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럼 내가 아니었어도 옆에 있는 사람 아무나 좋아했겠네!"라고 심통을 부리곤 했다.
사실 나는 우리가 초등학교 동창인 만큼 남편이 어릴 때부터 나에게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것이길 바랐다. 예를 들어, "그땐 몰랐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나 어릴 때도 너를 좋아했던 것 같아."라는 낭만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남자. 캬~ 이런 로맨티스트라니! 내가 꿈꾸던 완벽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절대 아니라 한다. 꿈 깨자 제발.
동창 남편과의 연애 그리고 결혼 이야기를 쓴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응원해 주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그 외의 누구에게도 알리진 않았지만). 본인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것이 낯간지러울 만도 할 텐데 남편은 오히려 주인공이 되어 영광이라 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옛 생각도 나고 즐겁다며 특별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란다.
그러고 보니 2023년은 우리가 커플이 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꼬깃꼬깃한 추억으로 남겨져 있던 우리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곱게 펴서 이야기로 이어가다 보니 20주년 선물이 되었다.
하아, 알고 보니 내가 로맨티스트였구나. 젠장.
이왕 로맨티스트가 된(되기로 한) 김에 그에게 줄 더 큰 선물을 찾아 추억 속 낭만 여행을 떠나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처음으로 같은 공간에 있었던 시절이 나타난다.
#scene 1
연극 연습 시간, 여자아이는 상대역인 남자아이에게 좀 더 큰 목소리로 대사를 읊어달라고 주문한다.
#scene 2
하굣길,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남자아이는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여자아이에게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를 건넨다.
#scene 3
조회 시간, 여자아이는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교실로 들어서는 남자아이를 보며, "오늘도 공찼어? 넌, 도대체 몇 시에 학교 오니?"라고 묻는다.
그 시절 우리는 스치듯 만났다. 확실히 첫사랑은 아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 시간 속에 남겨진 향기만은 그저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어른이 되어 하나로 이어졌어도 언제부터인가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는 어렴풋한 설렘만 기억하기에, 친구와 연인을 가르지 않는 마음은 끝없이 과거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교실에서 만나고야 만다.
우리는 어쩌면 30년 동안 서로의 향기를 기억하며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20년 전의 나는 그 향기와 언제나 함께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지금의 나는 영원히 그 향기를 기억하고 싶다는 소망을 담는다.
그리고훗날, 우리가 시간의 테두리 안과 밖으로 흩어져 잡은 손을 놓게되는 날이 오더라도, 언젠가 기어이 만날 수 있다면 감히 낭만이라 부르고 싶다. (아이유의 "시간의 바깥"을 오마주 했습니다)
낭만은 과거에만 있지 않았다. 우리의 시간을 더할수록 낭만은 쌓여가는 것이다.
남편과 손을 잡고 걷는 길,
혹시나 하는 마음에그에게 한번 더 물어본다. (아직 로맨티스트 남편을 포기하지못했음)
"날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정말 기억이 안 나?"
"그러네. 언제부터였을까?"
이 양반 끝까지 눈치 게임하는구먼.
먼저 좋아한 사람은 나여야 한다고 정해버렸으니 내가 말하기 전엔 절대 말하지 않으려는 심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