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덜컥"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갑작스럽다고 생각했으나, 주변에서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20대 중반부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가 조만간 그 동창놈이랑 결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단다.
또래보다 조금 일찍 결혼한 탓에 친구들은 늘 나의 결혼 생활을 궁금해했다. 친구들이 "행복해?", "재미있어?", "잘해줘?"라는 질문들로 알콩달콩 스토리를 꺼내주길 바랄 때마다 나는 싱거운 한 마디를 던지곤 했다.
"그놈이 그놈이야."
다만, 상대가 동창이었던 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장점은 존재했는데, 이는 때때로 단점이 되기도 했으나 이왕 내가 선택한 삶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1. 이미지 관리할 필요가 없다.
"집 앞인데 나올 수 있어?"
갑작스러운 남사친의 전화에 여자들은 당장 무엇을 입고 나가야 할지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러블리한 옷을 집어 든다면 어느 정도 썸 단계일 수 있고, 섹시한 옷을 고른다면 남사친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일 수 있으며, 추리한 트레이닝 복장으로 나간다면 아마 찐친이라는 표시일 것이다.
이 모든 단계를 거쳤던 나는 결혼 직후 다시 찐친 모드(내추럴한 복장과 용모)로 돌아갔다.
사귀기 이전부터 여러 차례 동네 패션은 물론 쌩얼에 안경 쓴 모습까지 보여주었으니, 최소한 집안에서는 하늘 끝까지 추켜올린 똥머리에 동글뱅이 안경을 쓴다 한들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눈물 콧물 다 보아온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집안에서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건 무소용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미지 관리란 어느 정도의 근면 성실이 수반되어야 하는 행위이기에 결혼 전에 집에서 하던 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은 게으름에 대한 관용을 의미했다. 이는 느긋하게 휴식할 수 있는 분위기로 이어졌으니 귀차니스트인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남들은 결혼 후 얼마 만에 생리 현상을 터 놓아야 할지를 고민하기도 한다던데, 남편의 경우 이미 오래전에 오픈 마인드를 장착했고, 나 역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었던 스멜로 인해 생각보다 빨리 내려놓았던 기억이 있다. 냄새와 소리까지 모든 걸 공유하고 나니 부끄러움은커녕 족쇄라도 풀린 듯 홀가분했다.
좋아하는 술자리라면 분위기에 취해 간혹 주책을 떤다는 것도, 노래방에서 매번 삑사리가 나면서도 굳이 고음 노래만 고른다는 것도, 어쭙잖은 실력이지만 랩을 할 때면 스스로 멋지다는 착각의 늪에 빠져버린다는 것도 남편은 이미 알고 있었고,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의 취향이자 매력으로 인정해 주었다. 가끔 이런 내가 창피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 원래 그거 좋아하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웬만하면 용인해 준 덕에 패션 코디나 화장법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고 다녔다. 지금도 가끔 남편에게 이런 스타일이 마음에 드는지, 혹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물으면 "난 잘 몰라.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나올 때는 내 스타일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더만)
근데.. 이거 존중이 맞는 거지? 서..설마 관심이 없는 건 아니겠지? 여전히 헷갈린다.
2. 내 친구가 네 친구다
썸 시절부터 남편의 대학교 앞으로 자주 놀러 갔던 덕에 그의 친구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동갑인 데다 오랜 기간 알아온 친구의 친구였기에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직은 순수하고 파릇파릇한 20대 초중반에 친구의 친구가 내 친구가 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우리의 결혼식 날, 여기저기 흩어져서 술을 마시고 있던 초등학교 친구들, 내 친구들, 네 친구들이 뒤풀이를 하자며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메뚜기처럼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을 하며 술을 마시다가, 안 되겠다 싶어 지하 호프집을 통째로 빌리고는 이들을 한 데 모았다.
족히 40명은 되는 우리 친구, 내 친구 네 친구들이 위아 더 월드가 되어 축제의 밤을 즐겼다. 내 친구와 네 친구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했다는 후일담도 들려왔다.
결혼 후 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 날, 초장부터 달리던 남편은 일찍이 뻗어버렸다. 그 때문에 남편의 몫까지 놀고 마시게 되었는데 새벽 2시가 넘도록 이 친구들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 힘겨워진 데다 홀로 뒷정리까지 감당해야 할 생각에 아찔해졌다. 이제 그만 집에 보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남들은 제수씨 힘들다면서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던데 너희들은 집에 안 가?"
"네가 제수씨였어? 내 친군 줄 알았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이 친구들과 밤새 놀기로 다시 결심하고는 주문을 받는다.
"뭐 더 필요한 거 없어? 마른안주? 과일?"
3. 평생 어린 시절을 나눌 친구가 생긴다
평소에는 우리가 동창이라는 걸 잊고 살지만 가끔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를 듣거나, 초등학교 근처를 지날 때, 혹은 동창들의 소식을 들은 날이면 이끌리듯 추억이 소환되곤 한다.
초등학교 시절은 이미 30년 전이기에 더러는 반쪽짜리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는데 남편이 나머지 반쪽을 찾아 줄 때면 1000피스짜리 퍼즐을 완성한 것보다 더 큰 감동과 환희가 밀려온다.
말썽꾸러기 누구 때문에 단체로 운동장을 열 바퀴 돌았다거나, 떡볶이로 유명했던 학교 앞 엄마 분식은 핫플레이스였다거나, 돈가스로 유명한 경양식 집은 1년에 1번 생일날에만 갈 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는 등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추억팔이일 뿐인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하찮은 나의 즐거움이 소소한 너의 즐거움과 만날 때, 우리는 다시 순수의 시절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