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편의 정의: 때론 남의 편, 결국엔 내편

비록 착하지는 않더라도

by 소소라미

"우리 OO이(남편 이름)는 참 착해"


남편을 어릴 때부터 키워주신 시할머니는 찾아뵐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동방 예의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슬쩍 콧방귀를 뀌곤 했다.


'이 사람이 "참" 착하다고? 도대체 어딜 봐서?'

확실히 착할 '선'과 나쁠 '악'으로 구분한다면 선의 테두리 안에 있는 건 맞다.


그러나 대놓고 참 착하다고 손주 며느리에게 자랑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는 듯하다. 내게 떠오르는 착한 이미지는 남을 먼저 배려하고 때로는 희생을 감수하며,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결코 악덕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도 "참" 착해는 아니다. 단지 남들과 세상에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남편은 내가 갖지 못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침착하고 여유로우며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한다. 손끝마저 깔끔하다.


그렇다 보니 쉽게 긴장을 하거나 어설픈 실수를 하지 않는다. 물건을 잃어버릴 일도 없으며 물 잔을 엎거나 음식을 흘리는 경우도 드물다.


하지만 본인이 야무진 성격을 지녔기에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면(=나)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며 눈으로 레이저를 발사하고 잔소리를 해댄다.


그럴 때마다 참 착하다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할머니, 아무래도 손자한테 단단히 속고 사신 것 같습니다만.


게다가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이 충분한 편은 아니어서 연락도 없이 귀가가 늦는 날도 빈번했다. 전화를 걸면 번번이 남편이 아닌,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라는 말만 반복하시는 여성분과 연결되었다.


이튿날 왜 연락이 안 되었냐고 물으면 눈에 술이 가득 들어찬 얼굴로,


"핸드폰 잃어버릴까 봐 술자리에서는 가방에 넣어두기 때문"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본인이 실수하지 않는 쪽이 더 중요한 것이다.


상대방 입장을 먼저 헤아려보려는 인심 또한 후한 편은 아닌 듯하다.


며느리는 평생 딸이 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대로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며느리인데, 가끔 시댁 식구들에 대한 서운함을 내비칠 때면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못돼서 그런 거라며 일축해 버린다.


참 착한 건 확실히 아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나에게 착하지 않은 남편은 때론 남의 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몇 년 전 누구나 알 만한 기업으로 이직한 적이 있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능력을 꽃피울 때가 왔다며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팀장과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팀장 또한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만든 자료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다른 동료에게 넘기기 시작하더니 나를 회의 명단에서 제외했으며 업무도 계속 축소시켰다.


평가 시즌이 도래했고, 팀장은 에둘러 표현했으나 난 그 말이 제 발로 나가달라는 의미임을 직감했다.


그날, 남편과 소주를 한잔 하게 되었다.


내가 실력이 모자란 건 인정하지만, 등에 유효기간이 있는 빨대가 꽂힌 줄도 모르고 최선을 다했던 지난날이 억울해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은 평소 같으면 울지 말라며 술이나 마시자고 했을 텐데, 이날은 조금 달랐다.


코끝이 빨개지더니 눈까지 빨개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냅킨을 한 움큼 빼서 눈에 콕콕 찍어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으로 그가 우는 모습을 보자 당황스러운 데다, 냅킨으로 찍어 내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해서 내 눈물은 쏙 들어가 버렸다.


남편은 눈물을 들켜버린 민망함을 만회라도 하고 싶었는지 목에 힘을 잔뜩 주고는 비장하게 말했다.


"나보다 키커? 나보다 운동 잘해? 나보다... 그래, 술! 술 잘 마셔? 계급장 떼고 맞짱 뜨자 그래!"


(남편아, 팀장은 여자야..)


남의 편은 결국 내편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