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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서 연인되기, 낭만 아닌 눈치 게임

괘씸하고 서투르고 어색하고 민망하고 억울하고

by 소소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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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느지막이 휴대폰을 켰다.


동창놈에게 온 문자 한 통. 그리고 부재중 전화 한 통.

나랑 같은 마음이었네 주저리주저리

'뭐야 이 자식. 내가 고백할 때까지 기다린 거야? 와 치사하다 진짜.'


내심 기분은 좋았지만 묘한 배신감과 함께 패배감마저 들었다.


뭐지 이 눈치 게임에서 진 것 같은 기분은?


그런데 그 문자가 다였다. 만나자는 이야기는 커녕, 더 이상 전화도 없었다.


다음날에는 아예 문자 연락도 없는 상태.


'역시, 친구로 남을 걸 그랬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건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니고 이럴 거면 차라리 마음을 주고받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졌으니 두 번은 지고 싶지는 않은 마음인 데다,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30cm였던 우리 사이가 1m, 2m로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나란히 걸을 수 없을지도 몰라.



고백한 지 3일째 되는 날, 문자가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너네 집 앞으로 갈게."

"그래, 이따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설마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닌 것 같다는 그런 건 아니겠지? "네가 아니면 나도 아니야! 이 친구놈아!"라고 말해줄 테다.


약속된 시간. 멀리서 동창놈이 나타났다. 손을 들고는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마주보는 것 조차 쑥쓰러워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다.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오징어 볶음과 함께 소주를 마시며(메뉴가 왜 그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남) 예전처럼 시시껄렁하고 가벼운 대화로 어색한 공기를 채웠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우리 이거 같이 할까?"

"응?"


동창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작고 귀여운 상자 하나를 꺼낸다.


"오늘 엄마가 누나 결혼 준비 때문에 주얼리 샵에 가신다길래 쫓아가서 우리 커플링도 사달라고 했어. 일단 나는 돈이 없으니까 엄마 돈으로 샀어. 내 용돈에서 까야지." (동창놈은 아직 대학생)


이제야 내 얼굴을 보며 활짝 웃는다. 보조개가 쏘옥 들어간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걷기로 했다. 아까보다는 조금은 거리가 가까워진 듯하다.


내가 먼저 물었다.

"근데 왜 이틀 동안 연락 안 했어?"

"아 그게 우리 집이 비어서 친구 놈들이 내내 같이 있었거든. 아직은 여자 친구 생긴 거 알게 되는 게 쑥스러웠어."


나도 네가 어색한 만큼 너도 내가 어색하구나.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더 가까이 걷는 것도, 서로 마음이 같다는 것도, 함께 숨 쉬고 있는 이 공기도, 함께 올려다 보는 밤하늘까지.


이제는 그가 묻는다.

"너는 왜 전화기 꺼놨어?"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어."

"에이 그럴 리가."


, 후련하다. 말을 하고 나니까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우린 그렇게 두 시간을 걸었다.


그런데 흘깃 올려다본 동창놈 얼굴 표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너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혹시 오늘 나 만난다고 너무 긴장했던 거 아니야?"

"아..."


아고, 안 되겠다. 12일이라도 먼저 태어난 내가 누나 노릇 좀 해줘야겠군. 용기 내어 말을 건넨다.


"음... 우리 한번 안아볼까? 그럼 괜찮아질 거야."


우리 사이는 기어이 0cm가 되었다.


몇 달 후 그가 불쑥 꺼낸 이야기.


"있잖아. 내가 커플링 사서 너네 집 앞에 찾아간 날, 네가 나 긴장했냐면서 우리 안아보자고 했을 때 나 사실 화장실이 엄청 급했거든. 긴장한 게 아니고... 헤어지고 나서 화장실 찾아다니느라 엄청 고생했다!"


아 잠깐, 그럼 그날 내가 굳이 안아보자 어쩌자 하면서 오버를 떨었다는 거네?


와, 한 번 진 것도 억울한데 또 졌다. 진짜 억울하다.

왜 말을 못해!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화장실 가고 싶다
왜 말을 못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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