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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백해버린 '직진녀'가 되었다

아, 몰라 몰라 이불 덮고 잠이나 자자

by 소소라미

밤공기가 쌀쌀한 날이었다.


이제껏 단둘이 노래방에 간 적은 없었는데 그날따라 술이 좀 과했는지 노래방에 가고 싶어졌다. 노래방 주인아저씨는 한눈에 우리가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신 건지, 특대형 룸으로 안내해 주셨다.


대형 화면을 기준으로 널찍한 의자는 ㄷ자로 놓여 있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양쪽 끝에 앉았다. 각자 마이크를 쥐고는 각자 노래방 책자를 무릎 위에 두었고 각자 탬버린을 옆에 놓았다.


각자 원하는 노래를 사이좋게 번갈아 부르고는 노래방을 나섰다. 이미 12시가 넘은 시각. 심야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버스정류장은 꽤 먼 거리에 있었는데, 평소에 와본 적 없는 낯선 동네였던 만큼 동창놈이 정류장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동창놈이라는 호칭은 임시적인 것으로, 2편&3편에 등장한 ABCD 중 한 명입니다)


노래방에 들어갈 때보다 바람이 더 매서워졌다.


그 시절 나는 추운 겨울에도 반팔에 코트만 입고 다니곤 했던, 멋 내다 얼어 죽어봐야 정신을 차릴까 말까 한 인간이었는데 그날도 얇게 입고 나갔던 기억이 있다.


"아, 춥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


동창놈과는 30센티는 떨어져 옷 깃 하나 스치지 않고 걷고 있으니 우리의 공간 사이로 온기는 모두 빠져나갔을 거다. 그러니 혼자 걷는 것처럼 추울 수밖에.


절로 몸이 움츠러져, 내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걸 셀프 허그라고 하던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남자 친구였다면 한 팔로 안아주었을텐데. 혹 나를 정말 아낀다면 옷이라도 벗어줄지 모른다. 썸남이라도 이 타이밍이면 뭔가 액션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하필 진.정.한. 남사친이라 정면을 응시한 채 이 딴 소리나 하고 있다.


"정류장이 생각보다 머네."


집에 다다를 무렵, 문자가 왔다.(깨톡 아닌, 문자 주고 받던 시절)


"집에 들어갔어?"


"응"이라고 보내려다 머뭇거리고는 답장을 미뤄두었다.


오는 내내 버스 안에서 "얘가 내 손을 잡았다면 나는 못 이긴 척 가만히 있었을 텐데"라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추워서 제 팔로 자기 어깨를 부여잡는 여자를 보고도 정면만 바라보며 걷다니. 정말 아무 감정이 없는 걸까?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을 텐데. 기회를 저버린 건 선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 때문일 거야. 절대로 선을 넘지 않겠다는 의 초강력 울트라 ~~지 말이다.


아, 근데 "집에 잘 들어갔는지"는 왜 묻는 거지?


옆에서 얼어 죽든 말든 갈 길 가던 양반이 잘 들어갔냐는 걱정을 하는 건 앞뒤가 안 맞잖아. 평소에도 이렇게 나의 귀갓길 안위를 챙겨줄 만큼 자상했던 기억은 없었기에 그의 확인 문자는 더욱 낯설었다. 잘 못 들어갔다고 하면 당장 택시라도 타고 달려올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의도가 뭐야?


아련했다가, 가련했다가, 화도 났다가, 헷갈렸다가를 수 없이 반복한 끝에.


안 되겠다. 백경 도사(전편에 나왔던 사주카페 점쟁이) 말만 듣고 가만히 앉아서 애정 운의 대상이 동창놈일 거라는 망상만 떨고 있을 수는 없어.


사주팔자에 기댈 필요도 없이 나는 이미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고 즐거웠다. 헤어지는 길에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부터 했으니까. 근데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갑자기 그놈 얼굴이 떠오른다. 부드러운 인상은 아니지만, 보조개가 쏙 들어갈 때마다 귀여움이 묻어나면서 나름 매력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도 보조개가 있었던 것 같다. 꾹 다물었을 때 유독 도드라져서 손가락으로 콕 눌러볼까 했던 기억.


일단 내 마음을 확인했으니 직진해 보기로 한다.

"응 잘 들어왔어. 근데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나는 우리가 친구여도 좋지만 주저리주저리, 사귀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주저리주저리."


눈 질끈 감고 문자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


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5분, 10분이 지나도록 답장은 오지 않는다.


아 망했다. 그냥 친구로 남을 걸. 이제 어색해지면 동창회에서 얼굴 어떻게 보냐?


그 순간 또 눈앞에 아른 거리는 귀여운 보조개. 아이씨 왜 또 그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휴대폰 전원을 껐다. 서랍 속 깊은 곳에 쳐박아 놓고는 침대에 눕는다.


마음에 이어 표정까지 들킬까 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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