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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우정 사이는 싫다고오!!

근데, 소개팅 자리에서 하필 네가 생각나더라

by 소소라미

동창놈과 친해지게 된 계기는 내가 소개팅을 주선하면서부터였다.

(동창놈이라는 호칭은 임시적인 것으로, 그는 전편에 등장한 ABCD 중 한 명입니다)


고등학교 친구가 주변에 괜찮은 남자 좀 소개해 달라며 연락이 왔을 때, 희한하게도 그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자식, 둘이 소개팅 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여태 보고가 없네.


궁금한 마음에 연락을 해봤다.

[나] "영이(소개팅녀, 가명)랑 어떻게 됐어?"

[동창놈] "아, 그게 나쁘진 않았는데 애프터는 아직 안 했어. 이번 주말에 시간 되면 영이랑 같이 보자. 저녁 사줄게."


나까지 꼽사리 끼라는 말에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소개팅 주선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다. 민망하면 분위기 봐서 빠져주면 되고, 어색하면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역할도 괜찮겠다 싶었다.


근데 막상 나가보니 이들 둘 사이에는 별 감정이 없는 듯했고, 영이는 자꾸만 핸드폰이 울려대더니 아예 밖에서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들어와 갑자기 급한 약속이 생겼다며 가방을 챙겨 나갔다.


'아, 내가 나오지 말았어야 했나.'


나와 동창놈은 잠시 당황했지만 한참 더 술잔을 기울인 후에야 헤어졌다. 그때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영이는 소개팅할 무렵 썸남이 생겼는데 공교롭게 시기가 겹쳤으니 일단 예의 상 동창놈의 마음이 궁금해 나온 것이란다. 그리고 나와 셋이 만난 애프터 아닌 애프터 자리에서 서로 호감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썸남에게 갔다는 것이다. 이거 서로에게 해피한 결말인 거, 맞지?



얼마 후 나는 대학 동기가 주선한 소개팅에 나가게 된다.


그때까지 소개팅 성사 확률 0%의 초라한 화려한 전적의 소유자였지만, 이번에야 말로 만회할 절호의 찬스라며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주 앉은 지 10분도 되지 않아 상대와는 도무지 통하는 게 아무것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직감하게 되었고, 그쪽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도 눈치챘다. 예상대로 앞으로의 만남을 기약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


이번에도 또 실패라며(여전히 0%)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도 모르게 동창놈 번호를 눌렀다.


통화가 길어지면서 그 사이 나는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다.


[동창놈] "아직도 안 들어갔어? 너 지금 한 시간째 동네 배회하고 있는 거 알아?"

[나] "응, 근데 날씨가 너무 좋은 걸."


소개팅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이야기는 숨긴 채, 괜한 날씨 핑계를 대며 헤벌쭉 웃었다.


소개팅남과는 10분도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는데 얘랑은 1시간 동안 이야기해도 지겹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언덕길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해도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즐거웠다.


그날 이후로 연락이 잦아졌다. 2~3일에 한 번씩 문자나 전화 통화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화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어제 과음했더니 머리가 아프다거나 낮에 짜장면을 먹었다는 등 시시껄렁한 주제들 뿐이었고, 동창들 소식을 서로에게 전하기도 했다. 가끔 둘 중 한 명이 주말에 영화나 보자고 제안하면, 만나서 영화만 보았다.


연락을 기다리거나 먼저 연락할까 말까 망설인 기억은 없다.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했고, 서로 바쁠 땐 한동안 연락 없이도 잘 지냈다.


심심풀이로 대학 친구와 사주카페에 간 날이었다.


쓸데없는 걸 잘도 기억하는 나는 도사님 이름까지 똑똑히 기억이 난다. 백경 도사라고 했다.

마지막 질문으로 그 나이대의 흔한 관심사인 연애 쪽 운수를 물어봤다.


"남자? 이미 옆에 있는데? 잘 둘러봐."

백경 도사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이제 궁금한 거 없지?"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다른 손님들이 기다리는 옆테이블로 넘어갔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필 그 동창놈이 생각나버렸기 때문이다.


[대학 친구] "야, 뭐야? 너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궁금해서 현기증 나고 미치겠으니까 빨리 정보 좀 달라는 표정으로 닦달을 하기 시작했다.


[나] "워워. 그냥 친구야. 뭐냐면 그 있잖아. 단둘이 여행 가도 안심될 것 같은 사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특별한 설렘도 없고 그저 편안할 뿐인걸. 누가 봐도 진정한 남사친이잖아.


게다가 나는 친구에서 연인이 된다는 그렇고 그런 서사가 아닌, 한눈에 후광이 비치거나 눈에서 별이 쏟아져 내려오고 머리에서 종이 울리는 그런 연애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단 말이다.


사랑과 우정 사이 이런 건 싫다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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