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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일을 한참 놓친 병아리 작가의 변

글쓰기 마감일 전후의 기록

by 세인


마감 D-2


브런치 연재 3주 차. 작가가 되어가긴 하나보다. 틈틈이 이번 주는 무엇을 주제로 써야 할지 고민하다, 글쓰기 창을 띄워 조금씩 끄적여보기도 한다. 무얼 쓸지 생각하고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아 괴롭기도 한데, 그 괴로움이 또 딱히 나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아직 3주 차니까 뭘 해도 좋은 그런 때인가 보다. 다른 브런치 작가님들은 어떤 글을 쓰는지 둘러보며,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한다. 쉬워 보였던 글 하나하나 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연재를 꾸준히 해나가는 작가님들이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한 등산가들처럼 한없이 높은 곳에 계신 것만 간다. 우러러보게 된다. 갓 태어난 신생아인 나는 어떤 글을 완성할 수 있을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다.


D day 오전


아직 주제를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몇 가지 생각해 놓은 것들이 있으니, 일단 오늘 하루를 잘 보내고, 글쓰기가 수월한 뇌가 되는 새벽시간에 글을 완성해 보자.



D- 2시간 전


큰일이다. 연재 마감까지 2시간. 아직도 이번 주 글 주제를 정하지 못하겠다. 우선은 노트북을 열어 이렇게도 저렇게도 몇 번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저장도 해보고. 그런데 발행할 만한 글이 아니다. 큰일이다. 시험장에 들어가 시험이 시작된 순간 눈앞이 하얗고 뇌가 정지해 버린 경험이 여태까지 한번 있다. 딱 그때와 같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D+1

결국 발행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새날이 밝았다. 괴롭긴 해도 나름 즐거웠던 압박감이 이제 나를 짓누르고 있는 상태다. 뭘 해도 머릿속엔 글쓰기뿐인 지경인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 결국은 마감을 훌쩍 넘기고 포기 상태가 되었다. 숙제를 미룬 적도 있고, 운동을 끊어놓고 한동안 가지 않은 적도 있다. 그때보다도 더 압박감이 생기는 이유는 고작 연재 3주 차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름대로는 글쓰기에 진지하게 임하고 싶은 책임감 때문일까. 그래도 평소 글쓰기에 자신이 있었고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글감이 고작 글 2개였다니. 한심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마음이 무겁다. 연재에 무슨 주제라도 정했어야 이런 고통을 덜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제 없이, 광범위의 글감으로 조금이라도 글쓰기를 편하게 해 보자 꾀를 부렸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어떤 하나의 큰 테마를 갖고 연재를 시작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뭘까. 생각만 많은 가운데 또 아까운 하루가 지나간다.



D+3

이제는 정말 글을 써서 발행해야 한다. 근데 마땅한 글감을 떠올리기에는 일상이 바쁘다. 직장에서는 글쓰기 마감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의사결정의 마감이 매일 나를 압박한다. 새로운 일엔 무얼 하나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후회가 제일 싫다. 그래서 중요하건 중요하지 않건 하나의 의사결정에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 마지막 순간(그야말로 마감 직전)까지 결정을 유보해두곤 한다. 누군가와 상의하기도 하고, 의견을 청취하기도 하며, 한 가지 고민에 대해 한동안 내 속에서 묵히고 삭히는 숙성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다 이 생각 저 생각 속에서 진액을 쥐어짜 낸 결론을 도출한다. 이런 생각을 뜸 들이는 과정을 통해 결정한 선택에는 항상 후회가 없고, 개인적인 만족도도 높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지만, 역시나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올해는 20년간 해오던 직장생활 중에서 (내 기준) 가장 중요한 신규 프로젝트가 연말까지 이어지고 있고, 동시다발적으로 내년, 내후년까지의 프로젝트도 새롭게 기획 중이기에 어느 때보다 새로운 결정거리들이 넘쳐난다. 세월이 흐르며 조금은 익숙해졌던 업무프로세스가 다 꼬여간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매일 생긴다.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하고 숙면을 취하는 날은 하늘의 별따기인 수준이다.라고는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이 다 핑계다. 여전히 글 주제는 정하지 못하고 마감 경과 3일 차가 흘러간다.



D+4, 새벽 4시


그나마 다행이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는 새벽이 가끔 있는데 그게 오늘이다. 사실 잠이 달아나서 이렇게 앉아있는 건지, 오늘을 넘기면 다음 마감(3일 뒤)까지 영향을 줄 거고, 2주 연속 연재를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모든 잠이 싹 달아난 건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지 않다. 따뜻한 물 한잔을 앞에 두고 그냥 무작정 노트북을 켰다. 확실히 모바일보다는 노트북이 뭐라도 끄적이기엔 적합한 것 같다. 오늘은 정말 어떻게든 발행을 해 볼 생각으로 이번 연재 글쓰기를 위해 문득 떠올랐던 글감들을 조금씩이나마 끄적여본다. 하나씩 하나씩 글감들을 정리하다 보니 연재를 지속할 수 있을만한 테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나는 평소 생각이 많은 편이다. 요즘(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유행하는 MBTI 성향 중 극강의 N 성향이다. 단어하나만 떠올려도 생각이 금세 우주까지 간다. 스무 살을 지나 20대의 나를 돌이켜보면 별달리 즐거운 날이 많지 않았다. 결정은 어려웠고 온통 시행착오 투성이었다. 하루 끝에 이불킥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괴로웠다. 지금보다도 더 선택과 결정이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내 오랜 단짝 친구들은 내게 그냥 좀 가볍게 즐기며 살라며 답답한 듯 나를 걱정해주곤 했다.


20대의 나는 단어 하나를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버스에 적힌 광고 문구에 '행복하세요'라고 쓰여있으면 금세 '행복은 뭘까? '로 시작된 생각이 몇 날 며칠을 갔다. '당신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같은 흔히 볼 수 있는 한 문장 때문에 많이 괴로워했다. '그래서 성공은 뭘까?'라는 생각 때문에. 마치 예술가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듯 한동안을 그 성공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고뇌를 거듭하고, 때론 관련된 책까지 동원하며 어렵게 답을 만들어 갔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스치는 단어 하나하나에 무차별 공격을 당하며 힘겹게 보낸 시간들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버릇이 여태 남아, 회사에서도 일상에서도 정의를 내리지 못한 낯선 단어가 생기면, 한동안을 고통 속에 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단어 하나에 꽂혀 괴로워하던 20대를 보내고, 한 두 개씩 내 안에 단어 정의들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삶은 조금 수월해졌다. 백과사전까지는 못되더라도, 하나씩 중요한 의미에 대해 나만의 정의가 쌓인 사전이 완성되어 가니 어두웠던 표정에도 무겁기만 한 내 일상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행복, 성공, 사랑, 좋은 사람, 삶의 이유, 선택 등 타인이 결정할 수 없는 나만의 기준과 뜻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정의가 생긴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더 견고해지는 나만의 단어사전 덕에 매일 맞이하는 일상에서 고민의 시간을 덜고 한결 가볍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 나를 걱정해 주던 단짝 친구들이 요즘 들어 나에게 종종 묻곤 한다. '친구야, 산다는 건 뭘까? '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 20대의 내가 던지던 그 질문들을 고스란히 내게 건네어온다. 내가 내린 정의가 답은 아니겠지만,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내 이야기를 전해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긴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은 가져야 하는 고민의 시간, 정의를 내려야 하는 단어 사전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미리 숙제를 마친 기분으로 나는 요즘 한없이 가볍게 살아간다. 아무 생각 없이 순간을 즐기기만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고민을 거듭하던 그 시절 어렸던 나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당분간은 내가 내린 단어의 정의들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연재의 테마로 삼아보려 한다. 그런 내 글들을 나와 비슷한 극강의 N이 읽는다면, 수많은 고민들 사이에서 작은 힌트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의미도 부여해본다.


휴, 한 번의 마감을 놓치고 그래도 고민을 거듭한 보람이 있는 것 같다. 당장 이번 주 마감부터는 조금 수월하게 글쓰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긍정 회로를 돌리며, 수차례 퇴고를 하고, 맞춤법 검사를 하니 무려 73개나 고칠 것이 뜬다. 후후 어쨌거나 괴로운 과정은 지나가고 꽤 만족스러운 지각 발행이 된 것 같다. Happy ending!! 오늘의 글쓰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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