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졸업하면 죽지, 뭐!

공부해서 장학금 타야지.

by silvery rain 이혜영

“누난 졸업하면 뭐 할 거예요?”

“글쎄! 졸업하고 꼭 뭐 해야 하나? 그냥 죽을까?”

“에이! 누나 장난하지 말고.”

“졸업해도 그냥 살 거야. 밥 먹으면서.”

대학교 졸업 학년이 되면 사람들은 묻는다. 졸업하고 뭐 할 거냐고. 난 대답했다. 그냥 사는 거지, 뭐. 아니면 죽든가.





대학생의 삶과 사회인의 삶을 구분 짓는 졸업.

2021년의 대학생들은 졸업을 유예하는 학생들이 많다.

대학 자체도 법적 근거나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졸업 유예제를 도입하고 있다고 한다.

졸업학점을 다 이수하고도 자발적으로 졸업을 유예하는 학생들을 일컬어 NG(no graduation)족, 취준생(취업준비생), 노대딩(노땅 대학생)으로 부르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학생들이 졸업을 미루면서까지 학교에 남아있으려고 하는 이유는 당연히 취업난 때문이다.




내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비교적 취업이 잘됐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취업이 됐으니까. 심지어는 학사경고를 두 번씩이나 받은 선배도 비교적 괜찮은 회사에 취업이 됐다.


그럼 나는 왜 취업이 안 됐을까? 학교가 후져서? 내가 들어갈 때는 비교적 괜찮은 학교였지만, 지금은 상당히 잘 나가는 학교다. 그래서 아니다.

그럼 학점이 서운해서? 물론 그것도 원인은 된다. 하지만 ‘미스터 학사경고’도 꽤 좋은 직장에 취직했으니 그것도 아니다.

아! 못생겨서? 그건 노코멘트다.

내가 취업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화려한 알바 경력 덕분이며, 때문이다.



나의 첫 알바는 가내수공업으로 종교단체 다이어리를 제작하는 영감님 집이었다. 대학입시 끝나고 입학 전까지 두 달 정도를 했다.

영감님의 집은 녹번동의 산동네였는데, 그 집에서 다이어리의 교정을 보고, 중랑교의 인쇄소까지 심부름을 다녔다. 당연히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녔고, 배를 쫄쫄 굶으며 다녔다. 고등학생 티를 못 벗은 관계로, 음식점에 들어가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돈도 없었지만.

모든 제작이 끝났을 때는 가로 20센티, 세로 30센티의 하드커버로 중무장한 300페이지 분량의 수첩을 양손에 열몇 권씩 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배달을 다녔다. 노끈으로 묶은 수첩 더미를 양손에 들고 중랑교에서 목동까지 갈 때는 알바고 뭐고, 다 패대기치고 도망가고 싶었다. 당시 중랑교에서 목동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내려서 지하철까지 걸어가고, 지하철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또 걸어가야 했다. 게다가 당시의 목동은 여전히 논밭이 있었고, 허허벌판도 있었다.


버스를 내렸을 때 인적이 없던 어둠은, 깜깜한 숲 속에 버려진 아이 같은, 절망으로 다가왔다. 한 손에 10㎏ 이상의 '설움'을 들고 도착한 종교단체의 들뜬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나의 서러움에 '소외감'까지 얹어주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언 손바닥을 파고들던 노끈의 집요함은 지금도 몸서리쳐진다.

내 생애 첫 알바였지만, 가장 끔찍한 알바였다.


그 알바에서 또 하나 끔찍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냄새였다. 정년퇴직한 교사인, 영감님은 골초였다. 영감님과 단둘이 작업할 때는 담배 쩐내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혈질의, 위압감으로 다져진, 전직 선생님은 무섭기도 했다. 당시엔 연장자에 대한 개념이 비합리적이어서 부모 연배의 ‘어르신’에게는 거의 무조건 순종하는 못되고(?), 비이성적인 상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작은 실수라도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는 선생님의 투지는 나를 말 잘 듣는 학생으로 퇴행시켰다. 그때 처음으로 담배심부름을 했다.


암튼 그렇게 나의 첫 알바는 일인 삼, 사역을 하는 중노동으로 끝났다. 두 달간의 알바로 내 손에 쥐어진 돈은 고작 15만 원. 그래도 좋았다.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으니.


하지만 결심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타야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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