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사무소를 나온 52조가 갓길에 차를 세운다. 휴대폰의 폴더엔 162개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 몰래 찍은 여자들의 얼굴과 신체 일부들, 노출된 자신의 신체 일부, 그리고 고속도로 사무소의 근무시간표. 사무소에서 찍은 사진은 모두 열네 장이다. 열네 장의 사진 중 의미 없이 찍은 교통카드 세장을 넘기자, 창구 너머에서 자신을 응대했던 여자의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52조가 사진을 클릭하자 휴지통이 나왔다. 사진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예. 주저 없이 사진을 삭제한다.
근무시간표를 확대해 이름들을 살핀다. 이상하다. 청하의 이름이 없다.
1조-정미진, 이하경, 서주희.
2조-윤화자, 하도미, 김현진.
3조-서영화, 김지숙, 한윤희
아무리 찾아봐도 청하의 이름이 없다. 그만두기라도 한 것일까?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만약 그만뒀으면 어디 가서 청하를 찾지? 초조함 때문에 소변이 보고 싶어 진다. 당장이라도 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차에서 나와 갓길 옆의 축대에 소변을 본다. 오줌 줄기가 시원치 않다. 찔끔찔끔 떨어져 지퍼 밑으로 번진다. 제길! 소변을 털고 지퍼 밑을 손으로 닦다가 순간 생각이 떠오른다.
아까 그 여자!
묻은 소변을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휴대폰을 살핀다. 사진을 확대해 자세히 훑는다. 역시 없다. 아까 그 여자의 이름도 없다. 요금소의 여자, 오동미. 쌀 이름 같은 그 여자의 이름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가명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것들이 내 전화를 그렇게 쉽게, 주저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따돌릴 수 있었구나! 씨발 것들! 아니, 아니지! 청하 같은 애를 보호하려면 그 정도는 필수지.
다음 단계를 계획한다. 청하의 이름과 근무 날짜를 알려면 우선 청하를 봐야 한다. 청하를 기다리자. 52조가 내린 결론이다.
에너지 드링크 세 병째. 청하의 이름을 알아낸 자신이 자랑스럽다. 청하의 이름은 이하경. 그녀의 이미지와 딱 맞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조금 있으면 하경의 교대 시간이 될 것이다.
52조는 인터넷 검색과 관찰을 통해 요금소의 업무시간과 패턴까지 알아냈다. 오늘로 일주일째다. 요금소 직원들은 조별로 돌아갔고, 하루 3교대로 5일을 일했다.
오후 1시 40분. 조금 있으면 다른 여자가 구멍을 통해서 나올 것이고, 그 여자가 요금소 안으로 들어가면, 5분이나 10분 동안 업무 교대를 하고. 그러면 하경이 나온다! 그럼, 나는 하경에게…….
아니, 아니지. 먼저 얼굴을 알리는 게 좋을까?
하경을 일주일 내내 지켜봐 왔지만 52조는 섣불리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존재를 하경에게 알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52조의 차는 이제 52조가 아니다. 자신의 번호판이 알려졌을지 모른다는 우려에 차를 바꾼 것이다. 52조는 이 차가 맘에 든다. 하경과 함께 탈 상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하다. 도색을 하고 실내를 꾸몄기 때문에 새 차처럼 보였고, 중형차라 고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경이 날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52조는 첫 만남이었던 그때를 우려하고 있다.
왜 하필 그때 하경이었을까?
하경 앞에서 바지를 벗었던 그날을 저주했다. 하지만 52조는 곧 마음이 편해졌다. 여자 대부분은 노출증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놀란 여자들의 기억은 노출자의 성기만을 확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52조는 경험상 알고 있다.
그래! 기억하지 못할 거야. 맞아! 기억 못 하는 것 같았어.
그동안 52조는 하경 앞을 몇 번 지나갔다. 말끔한 옷차림과 바르고 친절한 태도로. 하경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52조가 내린 결론이다.
해발 964미터인 도락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암릉이라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 때문에 등반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곳이다. 일엽이 큼직한 배낭을 단단히 잡아맨다. 이 또한 산악구조대 시절의 습관이다. 산악 구조원의 배낭은 각종 구조 용품과 비상약품이 들어있어 대략 20kg 정도 된다. 지금은 비어있는 가방이지만 일엽은 늘 이 가방만 들고 다닌다.
일몰 시간까지는 약 네 시간. 보통 사람들의 속도로 올라가면 다섯 시간 정도 되는 주행거리지만 산악 훈련으로 단련된 일엽은 네 시간이면 완주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일엽은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제봉코스를 선택했다. 제봉으로 올라 채운봉으로 내려갈 생각이다.
상선암 입구에 운집한 사람들은 가을 산의 이모저모를 찍으며 즐거워했다. 햇살과 뒤섞인 바람 속으로 나뭇잎이 떨어졌다. 일렁이는 햇살이 나뭇잎에 반사돼 눈이 부셨다. ‘낙엽은 가을로부터 날아온 편지’라는 글귀가 떠올라 일엽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도락산은 2주 전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속에서 살고, 산에 익숙한 일엽이지만, 산은 늘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자연은 그 명을 다하기 전엔 늘 새롭다. 인간의 눈에만 피었다 졌다 할 뿐, 환경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울퉁불퉁한 바위를 기다시피 내려오는 여자에게 길을 내어주고 등산로를 벗어나 풀숲에서 쓰레기를 줍기 시작한다. 등산로의 주변에는 휴지나 물병들이 버려져 있다. 일엽이 쓰레기를 줍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음료수 캔이나 병, 과일 껍질을 무심코 밟았을 경우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버린 쓰레기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한다.
누군가 뱉은 가래침이 일엽 근처의 나뭇잎에 떨어졌다. 침을 뱉은 사람은 그곳에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다. 나뭇잎에 가려진 일엽이 등산로로 올라오자 50대 초반의 남자가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안녕하십니까? 일엽이 인사하자 남자도 마주 인사한다. 남자가, 쓰레기봉투를 든 일엽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는다. 남자의 눈길은 개의치 않고 일엽이 계속 쓰레기를 주워나간다.
“수고하십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산에서 내려오던 40대 여자가 일엽의 수고를 치하한다.
제봉을 700m 정도 남겨놓은 지점이 되자 봉지의 삼분의 이 가량이 차올랐다. 등산로 주변에 떨어져 있던 쓰레기들이다.
“쓰레기 치우시나 보다.”
“그럼 이것도 여기다 버릴까?”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염치를 배우지 못한 노부부가 자신들의 쓰레기를 일엽의 봉지에 밀어 넣는다. 불쾌한 기분이 들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신선봉을 지나 정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 한 무리의 등산객이 돗자리를 펴놓고 식사를 하고 있다. 그들의 앞에는 막걸리병과 소주병들이 놓여있다. 하산하던 사람들이 점심 식사 도중 반주를 한 것이다. 7, 8명의 중년 남녀가 어울려 술을 마신 것 같았다. 그중의 몇 명은 취한 듯 비틀거렸다. 일엽이 도락산을 횡단하려던 계획을 수정한다. 산악사고의 상당수가 술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락산처럼 바위가 많은 산은 자칫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져 구르기 십상이다. 그들을 눈여겨봐 두고 정상으로 올라간다.
화려한 단풍들 속에서 수수한 듯 고고한 소나무가 일엽을 반긴다. 소나무의 모습이 장상근 대장을 닮아있다. 산에서 필요한 하나하나를 가르친 스승이다. 대장은 산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해서 살려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산에서 죽었다는 게 일엽은 믿기지 않았고 가슴 아팠다. 그것도 일엽의 실수로.
일엽이 어두워지려는 마음을 추스른다. 감상은 금물이다. ‘감상.’ 대장이 가장 금기시했던 단어다. 다른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냉철해야 한다. 초 단위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가득 찬 쓰레기 봉지를 배낭에 넣고 하산을 시작한다.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밑에서부터 들려온다. 트로트 음악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 좀 전에 봐 두었던 그 무리다. 그들 중 두 명의 남자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내려가고 있다. 상대방을 돕기 위한 것인지, 상대방에게 의지하기 위한 것인지, 둘 다 비틀거렸다.
“안녕하세요?”
“예, 예. 어이구, 안녕하십니까?”
갈색 바지에 빨간 조끼를 입은 50대 중반의 남자가 일엽에게 손을 흔들며 과장하여 인사한다. 눈가가 발그레하고 눈동자가 축축한 것이 상당히 취해 보인다.
“약주하셨나 봅니다. 제가 좀 부축해 드릴까요?”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손까지 내젓는 남자의 말에 하대와 존대가 섞여 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것이다.
“조심해서 내려가십시오.”
“옙!”
취한 남자가 일엽에게 경례를 하곤 손을 흔든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줄을 잡고 내려가야 하는 바위가 나올 것이다. 남자가 부담 갖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옆을 따른다. 술 취한 등산객 중에는 한사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이쿠!
다리가 풀린 빨간 조끼가 주저앉자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줄무늬 조끼가 옆으로 기울어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잠시 뒤 줄무늬 조끼가 발목을 잡으며 아파한다. 발목을 접질린 것이다. 일엽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남자가 다치자 다른 일행이 남자를 부축해 앉히고 발목을 주무르려 한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손대지 마시고요.”
“왜요? 왜 손을 대지 말라는 거예요? 발목을 주물러줘야 하는데.”
남자의 부인인 듯한 여자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일엽을 바라본다.
“제가 한번 봐 드리겠습니다.”
의사신가 보다.
일행들이 한 마디씩 거든다. 남자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심각한 곳은 발목이 아니라 먼저 넘어진 남자에 의해 당겨진 허리였다. 버티지 못하고 끌려 넘어지면서 허리가 비틀렸고, 엉덩방아를 찧은 타격을 허리가 고스란히 받은 것이다. 점점 심해져 오는 허리 통증에 남자가 신음을 내지른다.
“구조대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나 심해요?
어쩌면 좋대?
어떻게 부른대?
핸드폰 터지나? 어디로 해야 되지? 어디로 오라고 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일행들이 우왕좌왕하자 일엽이 나선다.
「수고하십니다. 산행 중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신선봉 밑 너럭바위. 11-06
네. 발목 염좌, 요추염좌인 것으로 보입니다. 부상자의 상태는 음주와 염좌로 인해 몸을 못 가누고 있습니다. 예. 신고자 이름은 경일엽. 전화번호는 010-.....」
구조대를 기다리는 사이 일엽이 여분으로 가져간 자신의 옷을 부상자에게 덮어준다. 산에서의 조난자는 땀이 식으면서 저체온으로 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술을 먹은 사람은 그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부상자의 부인이 재차 감사 인사를 한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구조대가 들것을 가지고 올라왔다.
“구조 요청하신 분!”
“수고하십니다. 제가 구조 요청했습니다. 이분이 허리를 다치신 것 같습니다.”
“일행이십니까?”
“일행은 아니고..... 경찰 산악구조대 소속입니다. 우연히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경찰 산악구조대 소속이라는 말을 할 때, 무엇인가가 울컥 올라온다. 부상자를 헬기로 옮기는 것을 도운 후 일엽이 나머지 일행을 도와 하산을 한다.
“모두들 조심하시고. 낙엽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울 수 있습니다. 줄을 잘 잡고 내려오십시오.”
헬기를 기다리고 부상자를 이송하느라 시간이 흘러 일몰이 가까워지고 있다. 가을이라 다섯 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지는 산의 특성상 하산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훌륭한 분이십니다!”
“아닙니다. 다음부터 산에서 약주는 조금만 드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이제 절대 안 먹겠습니다!”
“예. 안 드시는 게 제일 좋고요.”
“네. 알겠습니다!”
빨간 조끼 남자가 경례하며 외친다.
가파른 경사를 지나 낙엽이 깔린 널따란 암반이 나오자, 일엽이 왼쪽 다리로 바닥을 지탱한 후 양손으로 빨간 조끼의 남자를 부축한다.
“감사함다!”
“네!”
빨간 조끼의 남자가 팔을 들어 올리며 과장 섞인 몸짓으로 일엽에게 인사를 하자, 일엽이 남자의 인사를 기분 좋게 받아준다.
“이렇게 산악 경찰분 안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부상자의 부인이 일엽의 뒤를 따라오며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한다.
그러게 말야. 천만다행이지, 이런 분을 만나게 돼서.
정말 좋은 일 하시는 분이시네요.
늘 이렇게 좋은 일을 하시고, 행복하시겠습니다.
다른 일행들도 앞다투어 일엽에게 감사 인사를 한다.
그들의 인사를 듣자 일엽은 혼란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현재 휴직 중이고, 이직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은 그런 인사를 들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분명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다. 단 한 번도 그 일에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다. 귀한 생명을 구하는 일에는 생각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늘 행동이 먼저였고,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이젠 자신이 없다. 두려움을 느껴서가 아니라 판단에 자신이 없어서였다. 위험 속에서 순간순간 판단을 해야 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
휴직한 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엽은 마음을 다잡는다. 진심으로 원하기 전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