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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y rain Dec 07. 2021

[장편소설] 톨게이트 17.

17. 그 일이 있기 전, 톨게이트 사람들.

 주먹이 안면을 강타해오는가 싶더니 옆구리로 다리가 날아온다.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려 옆구리를 막는다. 전해진 충격에 팔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이제 조금 있으면 넓적다리부터 마비가 올 것이다.

 “잘 막았어. 도미 씨는 쿠션이 좋으니까 안 아파.”

 안 아프긴 개뿔! 스파링에 집중해야 하는데 허벅지의 통증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 스파링을 이렇게 거칠게 하게 될 줄 몰랐다. 하여간 저놈의 중딩! 도미의 스파링 상대는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다. 말이 중학생이지 몸은 말 같은 녀석이다. 170이 훨씬 웃도는 키에, 육상으로 단련된 몸을 가진 녀석이다. 학교 대표 단거리 선수라는 녀석이 킥복싱까지 하려 들더니 열의가 대단했다.

 “현기야! 살살 해라. 살살! 누님, 다치신다, 인마!

 “도미 씨가 잘 피하네. 역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관장의 코치에 도미는 더 열 받는다. 방어하고 있던 도미가 왼팔 오른팔을 번갈아 뻗으며 잽을 날려보지만, 현기가 패링으로 도미의 공격을 쳐낸다. 뒤이어 로우킥이 날아오며 도미의 대퇴부를 노린다. 더 이상 맞으면 안 될 것 같아 허리를 돌려 피하며 현기의 안면에 스트레이트를 날린다. 현기가 가드를 단단히 해 오른쪽으로 가볍게 피하자 도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프런트 킥을 날린다.

 “오, 도미 씨 좋아 좋아.”

 도미에게 프런트 킥을 허용한 현기가 양발을 번갈아 미들킥을 날린다. 허리를 움직여 피하며 현기의 왼발을 쳐낸다. 하지만 현기의 오른발을 놓친 도미가 왼쪽 옆구리에 타격을 받는다.

 어라! 이 자식 봐라? 좋아! 실전이다.

 잠시 껴안아 현기를 클린치하며 도미가 머리를 굴린다. 잠깐 떨어졌던 현기가 다시 붙으며 미들킥을 날린다. 봐주면서 했더니 이게 아주 맛 들였구먼! 현기의 미들킥을 쳐낸 도미가 더블 펀치를 날렸다가 현기가 막는 틈을 타 하이킥을 날린다. 주먹을 막으려다 하이킥을 맞은 현기가 잠시 비틀거린다. 종이 울린다. 종소리에 현기가 씩씩거린다.

 “관장님! 이런 게 어딨어요?”

 “뭐가 이런 게 어딨어?”

 “내가 맞은 다음에 종을 치면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자식아, 3분 됐는데.”

 “왜 하필 내가 맞으니까 3분 돼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넌, 인마 스파링을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는 놈이 어딨어?”

 “뭘요?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다 부상당하면 니가 책임질래? 니가 도미 누나 데꼬 살 거여?”

 “내가 왜요? 내가 왜 할머니를 데꼬 살아요?”

 “으이그, 이게 진짜!”

 도미가 현기의 머리를 글러브로 쥐어박는다. 현기가 머리를 비비며 구시렁거린다.

 “하여간 우리 도미 씨 킥은 예술이야. 예술! 넌, 인마! 도미 누나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 짜식이 봐준 줄도 모르고.”

 “아, 그럼 다시 해요!”

 관장이 현기의 머리를 쥐어박자 현기가 투덜대며 따진다.

 “밥이나 먹으러 가요. 가자! 현기야.”

 “누나가 사는 거예요?”

 투덜거리던 현기가 볼멘소리로 물어온다.

 “얀마, 도미 씨가 왜 밥을 사? 한수 배운 니가 사야지.”

 “내가 돈이 어딨어요? 그럼 관장님이 사요.”

 “누나가 쏠게. 우리 고기 먹으러 갈까?”

 고기 먹으러 가자는 소리에 현기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석쇠에 놓인 돼지갈비가 지글지글 끓기 시작하자 반지르르한 육즙이 돌고, 짙은 고기 냄새가 올라온다.  

 “와! 냄새 죽인다.”

 “아직 먹으면 안 돼. 돼지고기는 바싹 익혀서 먹어야 돼.”

 현기가 입맛을 다시며 고기를 집으려 하자 도미가 집게로 젓가락을 쳐내며 말한다. 현기가 다시 입맛을 다시며 밑반찬을 집어 입에 넣는다.

 “근데 누나는 왜 킥복싱해요? 여자가?”

 “자식아! 여자는 뭐? 이런 격투기는 여자들이 더 해야 되는 거야.”

 관장이 젓가락으로 현기의 머리를 톡 건드리며 말한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 운동도 되고, 몸도 날씬해지고.”

 “언제부터 했는데요?”

 “2년 다 돼가지, 아마.”

 “그래요?”

 “도미 씨, 태권도도 했다면서.”

 “진짜요? 어쩐지 발차기가 좀 다르더라. 근데 계속 태권도 하지, 왜 킥복싱을 해요?”

 "얀마! 킥복싱이 어때서? 짜식이 누구 망하게 할 일 있나?"

 관장이 정색하는 척했으나 눈은 웃고 있다.

 “싸울 때 좋잖아.”

 “어디 가서 싸우려고요?”

 “하고 싶은 게 있어서 하는 거야.”

 “뭐요?”

 “응?”

 “뭔데요?”

 “뭘 그렇게 묻냐? 인마!”

 관장이 고기를 뒤집으며 현기를 타박한다.

 “말해줘요.”

 “고기나 먹어!”

 “아, 뭔데요?”

 “경찰 하고 싶어서.”

 “네? 늙었잖아요. 누나 삼십 살 넘지 않았어요?”

 “야! 아직 삼십 안 넘었거든!”

 “근데 왜 경찰 하려고요?”

 현기가 고기를 연달아 입에 넣으며 묻는다. 한창 자라는 아이답게 먹성이 좋다.

 “부모 따라가는 거지, 뭐! 아빠가 경찰이셨어. 그런데 아버지가.....”

 도미가 갑자기 슬픈 표정이 되어 말끝을 흐린다.

 “왜요? 살인마한테 죽었어요?”

 슬픈 눈으로 현기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도미가 갑자기 깔깔대며 웃어버린다. 도미의 표정에 함께 심각했던 관장과 현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아버지 멀쩡히 살아계시거든! 왜 남의 아버지를 죽이냐? 자식아!”

 “아! 뭐예요!”

 “뭐가 뭐야? 아빠가 경찰이었는데, 어차피 다니던 직장도 잘려서 경찰 한번 해 볼까 한다, 왜?”

 “난, 또! 이 누나, 순 사기꾼이잖아!”

 “고기나 먹어, 자식아!”

 관장이 현기에게 갈비를 내밀자 현기가 날름 받아 뜯기 시작한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꿈속에서 수없이 봐왔던 그곳. 수건을 들고 냄새를 맡는다. 빨래 바구니 속에 들어있어서 축축함이 남아있다. 다른 빨래들도 꺼낸다. 하나하나 들고 살펴보며 냄새를 맡는다. 기분 좋은 냄새다. 아침에 갈아입었을 속옷이 나온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섣불리 팬티를 집어 들 수 없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집 근처나 여대 근처의 원룸을 방문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땐 이렇지 않았다. 여자들의 속옷은 수집품일 뿐이었다. 그런데 하경의 속옷은 성의와도 같은 느낌을 줬다.

 왜 이렇게 이 여자가 좋은 것일까?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든 속옷을 섣불리 코로 가져갈 수도 없다. 과호흡으로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심호흡하며 눈을 감는다. 속옷을 벗는 하경의 모습이 보인다.

 왜 하경이 좋은 것일까? 또다시 의문을 품어본다. 순결하고 청초한 하경은 아기처럼 맑은 미소를 갖고 있다. 따라서 전혀 계산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성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이 52조가 하경에게 집착하는 이유였다. 자신의 타락과는 별개로 무작정 끌리는 것. 더러운 기름이 깨끗한 물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시커먼 곰팡이가 새하얀 벽을 잠식하는 것처럼, 52조는 하경에게 스며들고 싶었다.

 하경의 속옷을 만지작거리던 52조가 속옷을 품 안에 안는다. 그러자 갑자기 슬픔이 북받쳐 올라온다. 느닷없는 눈물에 자신도 당황스럽지만, 갑자기 치받쳐 오르는 슬픔을 이길 수 없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쾌락에 신음하던 엄마의 모습이 하경과 겹쳐진다. 천국과 지옥이 한 공간에 존재하고,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진행되는 이율배반.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새어 나오던 엄마의 신음은 고통과 쾌락의 이중주를 보여줬다. 52조는 엄마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다.

 한참을 울던 52조가 한숨과 회한을 뱉어내곤 눈물과 콧물을 닦는다. 충분히 운 덕분에 마음이 개운해진 52조가 성기를 꺼내 묵은 감정을 털어내듯 변기에 소변을 쏟아낸다. 그러다 화장실의 곳곳에 소변을 뿌린다. 소변을 다 본 52조가 하경의 속옷으로 성기를 닦고, 내친김에 자위를 하려 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개가 짖고 있기 때문이다. 하경의 속옷을 품에 넣고 태연히 문밖으로 나온 52조는 전리품을 들고 차 안으로 들어간다. 차 속에서 맘껏 하경의 향기를 맡으며 자위하리라. 52조가 행복감에 몸을 떤다.  


 - 언니, 미안한데 좀 와줄래요? 무서워서 그래요. 집 앞 마트에 있을게요. -     


 운동하느라 가방 속에 넣어뒀던 휴대폰을 꺼내자 하경의 문자가 도미를 찾고 있었다. 발신 버튼을 눌러보지만 하경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미안해요. 아는 동생인데 일이 좀 생겼다네요. 먼저 갈게요. 더 드시고 오세요. 계산은 제가 할게요.”

 “아냐! 도미 씨! 내가 계산할게.”

 “오늘은 제가 계산할게요. 관장님은 다음에 사요.”

 “그럴까, 그럼.”

 “먼저 갈게요. 현기야, 많이 먹어. 더 주문해놨으니까, 실컷 먹어!”

 “네! 감사!”

 서둘러 인사를 마친 도미가 5인분을 추가한 후 계산을 하고 나간다. 택시를 잡아타고 하경이 있다는 마트에 도착하자 마트에서 뛰어나온 하경이 도미를 맞는다. 하경의 눈빛에 불안이 서려있다.

 “언니!”

 하얗게 질린 하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며 울음을 삼킨다.

 “왜, 왜? 무슨 일인데?”

 “집에 도둑이 든 것 같아요. 무서워서 들어가지도 못하겠어요.”

 “도둑? 지금 집에 도둑이 있어?”

 도미가 긴장하며 목소리를 낮춘다.

 “모르겠어요. 없는 것 같긴 한데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어요.”

 “신고는 했어?”

 “아직…….”

 “왜 신고 안 했어?”

 “확실하지 않아서. 언니 오면 하려고.”

 “집주인은?”

 “집주인 여기 안 살아요.”

 “알았어. 한번 가보자.”

 “언니, 신고 먼저 해야죠?”

 “괜찮아.”

 “그래도…….”

 “지금 없다며?”

 도미가 하경의 어깨를 두드린 후 앞장을 선다. 하경의 옥탑방은 단층집의 옥상에 있다. 옥상으로 올라가려면 철재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을 오르려던 도미가 난간을 잡고 멈춰 속삭인다.

 “잠깐만 기다려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다가 적당한 것이 없는지 담벼락 밑에 굴러다니던 짱돌을 집어 든다.

 “가자!”

 “언니,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 먼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가만있어봐. 괜찮다니까. 내가 있잖아.”

 “언니...”

 “괜찮다니까!”

 도미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계단을 오른다. 숨죽여 옥상에 오른 도미가 항아리 위에 놓인 벽돌을 주워 하경에게 건네준다.

 “혹시 모르니까 이거 갖고 있어.”

 하경은 도미를 괜히 불렀다는 생각이 든다. 벽돌을 든 하경의 손이 떨린다. 도미가 심호흡하며 앞장선다.

 “거기 누구야!”

 도미가 소리를 지르자, 내내 짖고 있던 개가 계단 밑까지 달려와 짖는다.

 “이리 와. 이리 와.”

 평소엔 보기 싫고 성가신 개였지만, 오늘은 구세주처럼 반갑다. 하경이 부르자 의외로 개가 꼬리를 흔들며 하경에게로 다가온다. 도미의 뒤를 따르던 하경이 개를 옥상에 올려놓자, 개가 도미를 보고 짖기 시작한다. 집 쪽에서는 이렇다 할 수상한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도미가 휴대폰의 플래시를 열어 옥상의 구석구석을 비춰보지만 역시 의심할만한 점이 없다.

 “개 안아. 벽돌 나한테 주고. 집으로 들어가 보자. 개부터 들여보내.”

 “언니 그러지 말고 우리 경찰부터 불러요.”

 하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속삭인다.

 “얜 괜찮다니까. 도둑 한 명쯤은 문제없어.”

 목소리를 낮춘 도미가 돌을 움켜쥐고 집안의 낌새를 살핀다. 그녀들이 의식하지 못하던 사이 사이렌 소리와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하경의 집 앞에서 멈춘다. 경찰차의 등장에, 개가 더욱 사납게 짖으며 계단을 내려간다.

 “어? 경찰이 어떻게 알고 왔지?”

 도미가 묻지만, 하경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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