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y rain Dec 10. 2021

[장편소설] 톨게이트 18.

18. 그 일이 있기 전, 톨게이트 사람들.

 경찰과 함께 들어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약간의 침입 흔적만 있을 뿐 특이할 게 없었다. 하지만 방과는 달리 화장실은 처참할 정도로 지린내가 진동했고, 빨래가 흩어져 있었다.

 “없어진 거 없는 게 확실합니까?”

 집 안팎 수색을 마친 경찰이 하경에게 묻는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니, 잘 모르겠어요.”

 혼이 나간 듯 하얗게 질린 하경이 횡설수설한다.

 “얘가 놀라서 정신이 없는 것 같아요.”

 “예, 그러실 겁니다. 혹시 나중에 없어진 거 생각나면 전화 주십시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도미가 진작부터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신고 들어왔습니다.”

 “누가요?”

 “한성우라는 동료분이 신고하셨습니다.”

 “아, 네." "성우한테도 전화했었구나?”

 “네. 언니랑 연락이 안 돼서.”     

 경찰이 가고 난 후 화장실을 청소하던 하경이 사색이 된 얼굴로 도미를 부른다.

 “언니!”

 “왜?”

 “팬티가 없어졌어요. 브래지어도.”

 “뭐? 그게 왜?”

 “빨려고 바구니에 넣어놨는데 없어졌어요.”

 “정말? 혹시 모르니까 잘 찾아봐.”

 “없어요. 다 찾아봤는데, 없어요.”

 “어머! 웬일이니? 재수 없어. 스토커 아냐?”

 하경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안 되겠다. 너, 짐 싸라. 우리 집에 가자.”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요?”

 “미안하긴! 괜찮아. 내 방에서 자면 돼.”

 “그래도…….”

 “내가 이런 일 당하면 너도 나 재워줄 거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해도. 언니 집에는 부모님도 계시잖아요.”

 “괜찮다니까. 내 방에서 자는 데 무슨 상관이야? 어서 짐 싸. 그리고 당장 주인한테 얘기해서 방 빼자. 다른 데로 옮겨야지, 어디 기분 나빠서 살겠니?”

 “언니, 고마워요.”

 “고맙긴, 얘는!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그만 고마워해.”

 하경의 짐은 많지 않았다. 옷 몇 가지와 책 몇 권. 언젠가는 떠날,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년 9월에 복학하니?”

 “네. 돈이 모이면 복학해야지요.”

 “엄마한테 갈 거야?”

 “글쎄... 그건 아직.....”

 며칠 전 함께 맥주를 마시다 자신의 집안 얘기를 하던 하경이 생각나서 도미는 안쓰러움을 느낀다.


 쉿! 잠깐!

 도미가 하경을 제지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얼마 전부터 개가 다시 짖기 시작하더니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 오고 있다. 도미가 옆에 있던 머그잔을 움켜쥐고 낮은 자세로 문 옆에 선다.

 “하경아!”

 남자의 목소리가 하경을 부른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도미와는 달리 하경의 표정이 밝아진다.

 “네!”

 하경이 문을 열어주자 성우가 하경의 안색을 살피며 들어온다.

 “괜찮니?”

 “성우 왔구나! 오려면 좀 빨리 오지. 왜 이렇게 늦게 왔니?”

 “오빠 못 오실 줄 알았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그러게요. 하경이 전화받고 곧바로 왔는데 늦었네요.”

 성우가 하경을 보며 말을 잇는다. “괜찮아? 다친 덴 없고?”

 “예, 없어요. 친구들하고 모임 있으셨다면서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해요.”

 “멀리 가 있었나 보구나.”

 “네, 제천에 있었어요.”

 “오빠, 고마워요. 경찰에 신고도 해 주고. 전 생각도 못했는데.”

 “아니, 뭘! 신고 안 해도 될 뻔했네. 파이터 누나가 있었는데, 괜히 걱정했네.”

 잠시 웃음이 지나가는 사이, 하경의 휴대폰이 소리를 냈다.

「엄마」

 하경이 휴대폰의 벨을 묵음으로 바꾼다.

 “전화받지, 왜?”

 “안 받아도 되는 전화예요.”

 복잡해진 하경의 마음을 알지만, 도미는 모른 척한다.

 “다친 덴 없어? 경찰이 뭐래? 뭐, 많이 없어졌니?

 성우가 하경의 안색을 살피곤 집안을 둘러보며 재차 묻는다.

 “네, 괜찮아요. 도둑은 보지도 못했어요.”

 “없어진 건?”

 “없어진 건....”

 얘기하는 도중 하경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온다.

 「하경아, 왜 엄마 전화 안 받아? 보고 싶다. 우리 딸!」

 “변탠가 보더라. 속옷이 없어졌대.”

 하경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느라 대답이 없자 도미가 대신 대답한다.

 “경찰한테 얘기했어?”

 “아직 그 얘긴 못 했어요. 그냥 이사하려고요.”

 “당장은 이사 못하잖아. 오늘 밤은 어떻게 할 거야?”

 “우리 집에 가기로 했어.”

 “그래요? 잘 됐네요. 지금 나갈 거예요?”

 방안에 부려진 가방을 보며 성우가 묻는다. 텅 빈 방안이 심란해 보인다. 작지만 깔끔했을 방이 하경을 닮아있어서 더욱 안타깝다.

 “응, 나가려던 길이었어.”

 “잘 됐네요. 저 차 갖고 왔어요. 아니, 잘 된 건 아닌가?”

 성우가 혼자 말하고 묻다 피식 웃는다.

 “나도 차 갖고 왔어. 아차! 안 갖고 왔다. 아까 술 한 잔 하고 있었거든.”

 “언니, 미안해요.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었을 텐데. 오빠한테도 미안하고.”

 “그 미안하다는 소리 좀 작작 해라. 안 미안해도 된다니까 자꾸 미안하다고 하네. 안 그러니? 성우야?”

 “그러게요. 이제 나갑시다!”     

  


 “천천히 얘기하다 들어와.”

 도미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하경과 성우의 손이 자연스레 서로의 손을 찾는다. 긴장 때문인지, 하경의 손이 평소보다 더 싸늘하게 식어있다.

 “손이 왜 이렇게 차? 많이 무서웠지?”

 하경의 손을 잡아 외투 주머니에 넣으며 성우가 다른 손으론 하경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네.”

 성우에게만은 늘 솔직한 마음을 내비치는 하경이다.

 “미안해. 빨리 못 와서.”

 “아니에요. 오빠가 왜 미안해요?”

 “오늘은 도미 누나랑 있고, 내일 같이 집 알아보자.”

 “응.”

 심각했던 상황인데도, 함께 있는 순간이 좋고 하경의 반말이 기쁘다. 성우가 하경을 바라보다 품 안에 넣는다. 품 안에 들어온 하경이 힘을 풀며 기대 온다. 며칠 전, 하경의 집 앞에서 처음 안았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하경이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성우는 기쁘면서도 씁쓸하다. 어쩐지 힘겨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같이 있으니까 좋다.”

 다리를 길게 뻗고 누운 도미가 기지개를 켜며 웃는다.

 “고마워요. 언니.”

 “야! 고맙긴! 내가 더 좋다.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고.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는 참 많이도 몰려다녔는데....”

 “하경아, 아직도 엄마하고 좀 그러니?” 잠시 추억 속의 친구들을 떠올리다 도미가 생각난 듯 묻는다. 저녁식사 내내 하경의 휴대폰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저장하고 있었다. 그것을 도미가 보게 된 것이다.

 “그냥 좀 그래요.”

 “엄마하고 얘기 한 번 해봐. 엄마한테 다른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글쎄요.”

 온순하지만 단호한 하경에게, 도미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한다.

 “하경아, 나 먼저 씻을게.”

 “네.”

 도미가 씻으러 나간 사이 하경이 휴대폰 메시지들을 확인한다.

 「하경아, 네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메시지 남길게. 엄마랑 그 아저씨는 네가 오해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엄마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도 알잖니. 엄마한테는 너랑 아빠뿐이란다. 사랑하는 내 딸, 하경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딸아! 엄마는 너 없이 살 수 없단다. 딸아, 돌아오렴. 우리 둘이 잘해 보자.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집 앞에서 그 남자의 품에 안겨 울던 엄마를 떠올리며 하경이 메시지 삭제 문자에 손을 댄다.

 메시지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하경이 휴대폰을 끈다.

  


 

 애초에 하경을 기다릴 생각은 아니었다.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며 하경의 체취를 감상할 생각이었다. 심호흡으로 들이마신 하경의 체취에선 쌉싸래한 허브향이 났다. 하경의 냄새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 빠져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여자의 발소리였다. 눈을 떴다. 자동적으로 발기되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경이었다. 52조의 차를 스쳐 지나간 하경이 집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창백해진 하경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경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 날렵해 보이는 여자가 왔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경찰이 왔다. 집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주차돼있던 52조의 차를 경찰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52조는 하경을 더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하경의 집에 남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52조는 무한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저렇게 엉덩이가 가벼운 썅년이었단 말이야? 아무 새끼나 집에 끌어들이다니! 갈보 같은 년! 창녀만도 못한 년!

 아냐! 우리 하경이가 그럴 리 없어. 하경이는 누구보다 순결한 애야. 하경이는 아이처럼 순수한 애야. 그런 애가 함부로 남자 따위를 사귀었을 리가 없어.

 52조는 하경의 속옷에 얼굴을 파묻고 화내다 울다를 반복했다.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 속옷이 짙은 냄새를 피워 올린다. 52조는 묘한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함께 집을 나서는 세 사람을 보고 52조는 결심한다. 하경을 곁으로 데려와야겠다고. 자신만의 하경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이전 02화 [장편소설] 톨게이트 17.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