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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y rain Dec 13. 2021

[장편소설] 톨게이트 20.

20. 톨게이트 여직원 실종사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더니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삽시간에 주위를 집어삼킨 안개는 비와 뒤섞여 온산을 휘감는다.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로 있던 산들이 안개에 휩쓸려 하나 둘 사라져 간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초조함으로 입이 타들어간다.      

「주여 넓으신 은혜 베푸사 나를 받아주시고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한 시간 넘게 찬송가를 들어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숨어서 남을 엿보기만 했지, 드러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52조는 하경을 납치하려는 계획을 곱씹어본다. 완벽하다. 굳이 완벽이라는 단어를 쓸 필요도 없다. 휴식시간에 하경을 덮치기만 하면 된다. 입구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데려오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역시 오늘도 안 되는 것인가?

 3일 전, 첫 시도 때에도 마른침만 삼키다 돌아섰다.

 오늘도 날이 아닌 것인가?

 52조가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친다. 통증이 뼈를 저리게 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다. 오히려 비겁한 자신을 고통이 채찍질하는 것 같다.

 한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지만 여전히 하경은 꼼짝도 않고 있다. 옆 라인의 여자가 문을 열고 나온다. 여자는 하경 쪽으로 살짝 고개만 돌렸다가 지하로 사라진다. 역시 오늘도 아닌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경을 유인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지켜본 결과 요금소 직원들은 절대 부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녀들이 나오는 것은 요금소와 사무소를 오갈 때뿐이다. 그렇다고 하경에게 폭력을 사용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을 본다. 1시 20분. 책을 보고 있는지 하경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있다. 하경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지만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온 안개가 하경의 부스를 감싸고 있다. 하경이 왼쪽 손으로 턱을 고이고 있다. 안개와 책상의 모니터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윤곽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하경의 집을 방문한 이후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하경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며칠 사이에 이사를 해버린 것이다. 하경은 늘 멀대 같이 홀쭉한 여자와 함께 다녔다. 몇 번 접근을 시도했지만 그 여자가 함께였다. 그리고 한 놈, 읍내에 나갈 때는 매번 그놈을 만났다. 52조는 참을 수 없었다. 하경과 함께 하기는커녕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요금소를 들르는 시간, 10초 남짓. 그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하경이 52조를 거부하는 인상을 내비쳤다. 52조의 선물이나 간식을 거절했다. 52조가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하경은 받지 않았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52조는 죽을 것만 같았다. 화가 나 죽을 것 같았고, 조바심이 나 미칠 것 같았고, 잃을까 봐 두렵고 불안했다.

 역시 기다리는 게 낫겠다. 결심을 하고 나자 피곤이 몰려온다. 눈두덩이 화끈거리며 눈이 감겨온다. 요 근래 잠을 못 잤다. 생각하다 잠이 든다.      

     


 들이치는 안개에 길이 보이지 않자 상향 등이 꺼지고 하향 등이 켜진다. 안갯속에선 상향 등보다 하향 등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안개등과 함께 하향 등이 길을 비추자 군실대던 안개가 갈라지며 일렁거린다. 잠시 흩어졌던 안개가 다시 모여 희고 긴 혀를 날름거리며 보닛 위를 기어오른다.  

 “날도 지랄 같네. 당최 뭐가 보여야지. 운전 괜찮겄어?”

 “우리한텐 좋은 거야.”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안갯속에 숨어있으면 되니까. 참말 좋구만.”

 똥파리가 순진해 보이는 표정으로 웃는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똥파리를 흘낏거리던 오 사장의 입이 씰룩거린다. 똥파리 같은 놈도 순진한 웃음을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다. 하지만 병신 같은 놈이라는 단어로 그 웃음을 묵살한다. 물론 겉으론 내색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 사장.... 아니, 오형. 미안, 미안혀. 오 사장이라는 말이 입에 붙어놔서리. 그런데 오형. 내가 잊어버려서 그런 것은 아니고오, 지시한 것을 한 번만 더 얘기해주먼 안 되까?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그르치면 안 되니께 묻는 말이여.”

 “톨게이트 가기 전에 차를 세우면 거기서 내려. 쥐도 새도 모르게 계집년한테 가서 기절시켜서 빼내 오면 돼. 그때 내가 차를 댈 테니까, 계집년 하고 같이 뒷자리에 타. 그러면 거기서 끝이야.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려, 그려. 알았어. 쉽고만. 내, 이걸로 확 후려쳐서 데리고 올 것이구먼.”

 똥파리가 쇠로 만들어진 밥주걱 모양의 둔기를 휘두른다. 길이는 15센티 정도 되고 두께는 1센티 정도 되는 단단한 쇳덩이다.

 “죽이면 안 돼. 알지?”

 “알어, 알어.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죽이면 델꼬 놀 수가 없잖여.”

 똥파리가 히히거리며 잇몸을 드러내 웃는다. 여자에게 행할 일들에 들뜬 것이다.

 “그런데 몇 시여?”

 “몇 시는 알아서 뭐하려고?”

 “그냥...... 궁금혀서.”

 똥파리가 시계 창을 기웃거리다 말을 얼버무린다. 오 사장도 시계를 본다. 1시 31분. 똥파리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봐 버리자 불쾌해진다.

 뇌가 없는 새끼가 시간은 봐서 뭘 한다고.

 “근데 말이여 알 수 없는 게 있어서 말인디.”

 “뭐가?”

 “저기, 그냥 궁금혀서 하는 말인디.... 왜 나만 심든 일을 해야 하는 건가?”

 의외의 질문을 받고 오 사장이 당황하지만, 당황한 표정을 들키지 않게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왜 대답이 웂어? 씅질난겨?”

 “김형은 운전할 줄 모르잖아.”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저음으로 천천히 대답한다.

 “아, 맞어 맞어. 그려, 그렇구만.”

 똥파리가 순진한 웃음을 웃으며 안심한다.

 “근디 오 사장. 아니, 오형. 잠깐 차 좀 세워주면 안 되까? 똥이 매렵네.”

 “뭐?”

 “미안햐. 긴장혔는가 벼.”

 “안 돼. 일 끝나기 전까진.”

 “지발 부탁여. 지발!”

 말을 하며 똥파리가 방귀를 뀐다. 설사를 지릴법한 물 방귀다. 역한 냄새가 퍼지자 구토가 쏠린다.

 “에이, 씨발!”

 “미안혀, 미안혀. 그래도 그렇지 왜 쌍욕은 하고 그려?”

 “알았어.”

 오 사장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차를 세운다. 어색한 오 사장의 미소가 잔인해 보인다.

 “빨리 싸.”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손가락으로 항문을 막고 뛰며 똥파리가 고마워한다. 시야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바지를 내린 똥파리를 오 사장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본다.


 시동을 끄고 혼자 앉아있으니 적막감이 느껴진다. 방귀 냄새를 몰아내려고 열어둔 창틈으로 똥파리의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듣기 싫어서 창문을 올리자, 불현듯 안개와 함께 들어온 한기가 느껴진다. 간간이 지나던 차들도 끊겼는지 어둠만 뒤덮여 있다. 오 사장이 내뿜은 숨과 안개가 차가운 유리에 닿자 물방울이 되어 맺힌다. 오 사장이 생각을 정리한다. 자신이 왜 이렇게 사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지만, 몸에 달라붙은 송충이를 떼어내듯 털어버린다. 휴대폰의 시간이 1시 42분을 가리키고 있다.

 오 사장이 차에 시동을 건다. 눈치를 보며 뭉그적거리던 똥파리가 시동소리에 놀라 일어나며 바지를 입는다.

 인정머리 웂는 놈. 저 놈은 눈깔이 꼭 그 육시랄 놈 같다니께.

 똥파리가 중얼거리며 자신의 아버지와 오 사장을 동시에 욕한다.

 뛰어 들어온 똥파리에게서 축축함과 냉기가 느껴진다. 앞 유리를 향해 올렸던 히터를 실내로 돌리자 냉기와 축축함이 사그라진다.  

 “미안혀. 오래 안 기달렸지이?”

 “이제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알지?”

 “그려, 그려. 오형이 차 대면 내가 지지배를 낚아오면 되는 거 맞잖여.”

 “그래. 별거 아니니까 잘할 수 있지?”

 “그려, 잘할 수 있고말고. 내가 태생적으로다 잘하는 게 그것이잖여. 걱정말어. 자, 이제 출발 허세. 출바알!”

 같잖은 자신감을 내보인 똥파리가 아니꼽지만, 오 사장은 내색하지 않고 서서히 차를 움직인다.        

     


 몇 분이나 잤을까? 서서히 들어선 차의 엔진 소리가 유난히 음습하다. 차 소리에 눈을 뜬 52조가 게슴츠레한 눈을 다시 감는다. 하경을 쫓아다니느라 한 달 가까이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집에 돌아가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애써 눈을 뜬다. 눈꺼풀에 느껴지는 이물감을 떼어내려 눈을 비빈다. 그러자 흐릿하고 뻑뻑한 눈에 검은 차의 형체가 들어찬다. 차는 갓길에 정차한 채 미동이 없다. 졸음을 쫓기 위해 정차를 한 것 같았다. 시계가 2시 12분을 가리킨다. 잘못하면 일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경의 1번 요금소는 고속도로 사무소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52조의 차는 사무소의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주차장은 요금소를 감시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컴퓨터에 머리를 기댄 하경은 꼼짝도 않고 있다. 졸고 있는 것 같다. 졸고 있는 하경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늘 긴장한 자세로 꼿꼿이 앉아있거나, 책을 보곤 하던 하경이었다. 그런 하경이 졸고 있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 모습도 싫지 않다. 들어갈 틈이 있어 보여서 더 흐뭇하다.

 전번자의 휴식이 끝나는 세시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세시가 되면 휴게실로 가는 하경을 기다렸다가 차로 데려오면 되는 것이다. 하경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하경과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하경은 만나주는 것은 고사하고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하경을 보는 것은 고통이었다. 야속한 마음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런 조심성 많은 태도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경만 함께 있어준다면 자신도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52조는 생각한다. 실제로 하경을 만난 이후로 성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는 사라진 것 같았다. 이전에는 하루 종일 성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성에 지배당해온 삶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팬티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눈을 떴고, 알몸으로 자위를 하며 기지개를 켰고, 밥을 먹을 때도 성기에 손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팬티를 내린 채였고, 전화를 받을 때도 성기를 주무르고 있었다. 심지어 꿈도 대부분이 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하경을 만난 후로는, 물론 모든 관심사가 하경에게 집중되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이 사라졌다. 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느라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간혹 성에 연관된 생각을 할 때에도 그건 하경과 함께였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하경은 이미 애인이었고, 아내였고, 누이였으며, 엄마였다. 이제 상상을 실현할 시간이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만으로도 52조는 가슴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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