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쿠네이트라
너를 처음 만난 건 15년 전 하얀색 건물 앞이었어. 쿠네이트라(Quneitra) 방문 허가증을 받으러 가던 길이었지. 너의 첫 인상은 강렬했지. 몇 달은 다듬지 않은 듯 풀어헤친 머리와 태양에 자연스럽게 온몸을 맡겨 생긴 구릿빛 피부는 ’자유‘라는 단어가 생갔났어. '여행 생활자'가 어색하지 않았지. 처음에는 일본인인 줄 알았어. 시리아에서 한국인을 보는 건 극히 드무니까.
"한국분이세요?"
라고 묻는 너의 말에 흠찟 놀랐어.
"맞아요. 한국 사람이에요. 혼자 여행 오셨어요?"
"네. 저는 영국에서 일 년 정도 자원봉사를 하고 여행 다니는 중이에요.”
많아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어. 가녀린 체구의 여인이 홀로 세계를 누비는 모습에 경탄할 수 밖에 없었지. 나는 방문 허가증을 받기 위해 직원이 내뱉는 시리아식 영어에 고전 중이었어. 너는 나를 대신해서 유창한 영국식 영어로 내 것까지 받게 해 주었지.
"같이 움직이실래요?"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 ’네!‘하고 네 뒤에 졸졸 쫓아다녔어. 한편으로는 어린 사람에게 의지한다는 게 창피했어. 그때의 나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삶을 버텼거든. 너와 함께 작은 봉고차에 몸을 실었어. 다소 거친 운전사와 아내가 함께 있었지.
'이 차가 목적지까지 제대로 가는 게 맞겠지?',
'혹시 우리를 볼모로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에 두 손을 꼭 쥐고 있었어. 하지만 너는 아무렇지 않았어. 아랍어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고 있었지. 운전사는 영어를 거의 못했어. 나는 쭈빗거리고 있었지. 너는 나와 반대로 운전사와 손짓, 발짓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지. 금새 친해 졌는지 서로 농담을 하며 웃음꽃을 피었지. 같은 차 안에도 나와 너의 공기는 달랐어. 어느덧 너와 운전사 부부는 친구가 되었고 운전사는 너에게 작은 인형을 선물했지. 운전사 부부에 있어서 나는 지나가는 객이었다면 너는 인연었던거야. 그 모습이 부러웠어.
‘낯선 공간에 녹아들지 못하는 나는 이방인이구나.’
"쿠네이트라는 왜 가시는 거예요?“
라며 너는 나에게 물었지.
"론니 플래닛을 보다가 여기가 옛날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치른 곳이라 해서요."
라고 답했지.
"아... 그렇구나..."
"S씨는요?"
"저는 여기가 3차 중동 전쟁의 격전지라고 해서요. 이스라엘 놈들이 이 곳을 점령하고 철수하는 그날까지 파괴했다잖아요. 나쁜 놈들... 흔적을 보고 싶었어요. 골란고원도 함께요."
너의 말은 묵직하게 다가왔어. 불의에 맞서는 당당함이 느껴졌지.
쿠네이트라에 도착하고 함께 이곳 저곳을 다녔지. 이스라엘 침공 후 재건하지 않고 그대로 둔 쿠네이트라였어. 무너져 내린 담벼락과 반쯤 꺾인 기둥, 군데군데 포탄으로 듬성듬성 구멍 난 건물의 잔해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어.
"정말 나쁘지 않아요? 자기들이 쳐들어와서 땅을 빼앗고 철수할 때까지 폭격하고... 죄 없는 이들의 터전을 망가뜨렸잖아요."
열변을 토하는 너를 보며 나는 ‘이 친구 나이 때 무엇을 했었지?’하고 자문하게 되었어. 너는 나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져 주었어.
궁금했어. 네가 어떠한 연유로 외국을 돌아다니는 건지. 보통 그 나이면 고등학생 아니면 대학생일 것 같은데. 궁금증에 못 이겨 너의 삶에 대해 물었지. 너는 고등학교를 자퇴했었다고 했어. 폐쇄적이고 서열 중심인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이 불합리하다고 했지. 자퇴한 후 여행을 다니다 공동체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공동체 봉사활동까지 이어졌다고 했어. 충격이었어. 나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거든. 너의 용기와 패기가 나를 하염없이 낮은 사람으로 만들었어. 나는 초중고를 나와서 적당한 대학에 들어갔고 무난한 전공을 선택하고 안전한 직업을 가졌지.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사는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으니까. 하나 너의 인생은 '당연함'에 의문을 품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을 깨려고 했어. 너만의 호흡과 속도로 세상을 대하고 있었지. 나는 주변을 의식해서 두리번거리는 미어캣 같다면 너는 창공 하는 한 마리의 커다란 독수리 같았어.
해가 질 무렵, 다마스쿠스로 향했어. 덜컹거리는 버스, 무언수행하듯 창밖을 바라보는 나, 현지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는 너... 그렇게 우리는 기약없이 헤어졌지.
너를 만난 후 여행 하는 내내 머릿 속이 복잡했어.
'내 삶의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에게 떳떳한 삶이란 무엇일까?‘
상념들이 머릿속에 가득했지. 그 찰나의 인연이 내게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었어.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오겠지.
내가 걷는 길을 너도 걷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