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완벽하다고 생각될 사랑
때로는 생각지도 못하게 무리한 요구를 불쑥불쑥 상대방에게 쏟아낼 때가 있다. 왜 나의 이런 점조차 이해해주지 못하는 거지? 왜 이럴 때 이런 거슬리는 행동들을 반복하는 거지? 날 존중하지 않는 건가? 감정은 어느 때이고 이성적으로 컨트롤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늘 실수를 일삼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에 그들도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허점투성이의 사랑에 지칠 때면, 보다 완벽한 사랑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이런 나라도 아무런 거짓 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혹은 내가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면서 말이다.
순애(純愛) :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
순애(殉愛) :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침.
순애라는 단어가 두 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약간은 다른 듯 비슷한 이 단어들은 아무래도 인간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에 가깝다 보니, 이런 완벽한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여러 창작작품들 속에서만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늘 문제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은 아무런 현실적 어려움 없이 이런 순애를 실천에 옮기곤 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 속은 현실이 아니니까, 당연히 그들은 그럴 수가 있다. 그런 작품들에 노출된 누군가는 자신의 연인에게 그런 모습들을 알게 모르게 기대하게 될지도, 혹은 말했듯이 자신의 모든 걸 던져서라도 만남을 이어가고 싶은 강렬한 누군가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단순히 인간의 욕구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스스로를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에 몰아넣은 꼴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부끄럽지만 나 역시도 한때 순애를 추종했었다. 어쩌면, 지금도 아주 약간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사랑은 서로를 부서지게 할 뿐이다. 제아무리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일지라도 제대로 된 노력이나 관심을 게을리하면, 어느샌가 먼지가 쌓이고 얼룩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노파심에 이야기하지만, 나는 사랑에 있어서 비관론자가 아니다. 다만, 사랑에 대한 이상화를 거듭하거나 사랑의 기대치를 올려놓으면 놓을수록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은 겉보기에는 드라마틱하지만 그 실상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순수하고 깨끗할 수 있는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초장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에게 그나마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정도일 것이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본 적이 있는가? 혹은 모든 것을 바치는 이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대개 그런 사랑들의 결말이 좋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지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비뚤어지는 자신을 마주할 뿐이다. 사랑은 상호작용의 행위이다. 모든 것을 바치는 상대를 만나길 원한다면, 나 역시도 그 상대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그 부담감으로 인해 사랑의 문턱을 쉽사리 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그런 사랑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유한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거기에 어떠한 지속성도 부여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이 지치거나 비뚤어질 게 뻔하다.
"오빠 변했어."
연애를 시작하기 전과 연애 초반에 그토록 있는 것 없는 것 다 바쳐서 헌신했던 순애남은 어느 순간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스스로가 지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다 좀 더 지속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겨서 아주 조금 더 이어나간다 해도, 더욱 비뚤어진 상대를 마주하거나 예전과는 달리 핼쑥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연애 초반에는 나의 헌신에 고맙다는 말을 아낌없이 주던 그녀가 웬만한 정성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자주 보일 정도로 달라져 있는다든가, 혹은 스스로가 계속해서 주기만 하다 보니 어느샌가 보상심리가 작동해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는 데에 거리낌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사람에게 책정된 '나'라는 사람의 기본값은 너무나 고평가 되어 있어 정상적으로 되돌리기에는 힘이 부칠 것이다. 내가 무리해서 사랑을 준만큼, 그 사람 역시 온전히 받아내는 데에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과 사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흔들리고 변한다.
그럼에도 순애는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사랑 가운데, 꽤 괜찮은 표본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성 간의 첫 만남에서 흘러넘치는 도파민으로 몰아붙이는 형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서로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이루어나가야 하는 목표로써 말이다. 서로에게 주는 것, 받는 것에 어떠한 조건이나 거리낌을 서서히 줄여나가면서 상대방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사랑을 가꾸어 나간다면, 순애를 불가능의 영역으로부터 한층 더 현실 세계로 끌어올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주는 동시에 받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내가 무언가를 상대방으로부터 원한다면, 항상 상대를 위해서도 똑같이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자. 무작정 퍼주는 상대로부터 신이 나서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그것은 종국적으로 서로를 괴물로 만드는 행위이고, 받아들이는 쪽도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기억하자, 일방적인 순애는 오히려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