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소서노의 아들 비류
“사……사……삭……”
귓속을 거스르는 소리.
“스……스……삭……”
소리를 감추기 위해 절제했으나 어쩔 수 없이 나는 소리.
“사……스……슥……”
감추려는 안간힘을 거스르고 나는 소리.
나는 강대업이 꾸는 꿈속에 있었다. 군복을 입고 강원도 철원 전방에서 밤 보초를 서는 중이었다. 잠시 졸았는가, 싶은데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났다!
머리카락이 철모 안에서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꿈속에서 21세기 강대업은 헐겁게 맨 총구를 바싹 조여들고 귀를 기울인다.
다시 나는 소리. 나는 눈을 떴다.
“사……스……슥……”
숨죽인 소리.
이제 비류인 내가 소리를 듣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다. 내 방에서 움직이고 있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인데 내 방에서 움직이고 있나.'
익어진 시야에 움직이는 물체의 정체를 알겠다. 유모다. 온조를 키우는 그 유모. 그 유모가 내 방에서 소리를 죽이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함이다. 방 한 곳에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던 함. 그저 장식으로만 존재하던 것. 이제껏 그 함의 존재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열린 함 뚜껑, 안을 뒤지는 조심스러운 소리. 갈등이 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소리를 내어 깨어났음을 알려야 하나?'
'이제 더는 한 방에서 자지 않는 유모가 왜 내 방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나.'
유모가 나를 뒤돌아본다. 놀래라!
유모가 조용히 함을 닫는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는다. 유모가 나간다. 문을 닫기 전 다시 뒤돌아 나를 본다. 눈을 떠 보고 있던 나는 또다시 놀래라! 얼른 눈을 감는다.
“사……사……삭……”
유모가 멀어진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강대업의 본능이 나 비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홉 살 작은 나는 작은 몸으로 어둠 속을 날렵하게 움직였다. 사르륵, 소리 내는 유모의 치맛자락이 건물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재빨리 그 뒤를 따른다.
유모가 보이지 않는다. 유모가 사라졌다! 나는 어둠 속 건물 벽에 붙어선 채 귀를 활짝 열어 유모의 흔적을 쫓는다.
목소리가 들린다.
“이것이오?”
낮은 남자의 목소리. 나는 목소리의 크기로 위치를 가늠한다.
“그렇습니다.”
유모의 목소리.
사내의 목소리. 이어지는 유모의 질문.
“모두 편안하시오?”
무언의 응대가 분명한 침묵.
“조심하시오.”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내가 유모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재빨리 다시 나의 방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날 듯 들어와 유모의 소리 흔적을 쫓았다.
스르륵, 유모가 치맛자락 소리를 죽이며 온조의 방으로 사라졌다.
아홉 살 비류라면 몰라도 강대업과 합체된 나 비류는 지금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다.
'유모는 단순한 유모가 아니다!'
대화를 나눈 사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그에게 전달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유모는 그저 온조의 유모가 아니다!
불현듯 ’나의 유모‘가 떠오른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유모. 내게 어머니 소서노 다음으로 어머니였던 유모. 강대업과 합체된 나는 마음이 다급해진다. 무슨 일인가가, 위험한 무슨 일인가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새아버지 고주몽과, 새나라 고주몽과 더불어 고구려를 건국한 어머니 소서노를 향해,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강대업으로 합체한 나는 노력한다. 지금 비류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황 인식과 해야 할 일에 대해.
회귀한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비류가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시작점은 일본의 야욕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비로소 회귀한 강대업의 대업 하나가 그려졌다.
'바로 이 대업(大業)!'
'그러려면……그러려면…….' 온 마음을 모아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먼저……가장 먼저 해야 할 일……그 일이 무엇이지……?'
머리가 어지럽다.
'아, 생각났다!'
지금은 B.C. 37년 이른 봄.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 이념으로 단군 왕검이 드넓은 만주 대륙에 한민족의 나라를 연 지 2천3백여 년. 그 2천3백여 년 동안 한반도와 광활한 만주 벌판을 아울러 통치하던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古朝鮮)은 이제 스러지고 없다. 이제 고조선이 붕괴된 그 자리에는 고조선의 후예들이 여러 국가들로 난립한 채 제각기 자웅을 겨루는 어지러운 상황이다.
북부여, 동부여, 옥저, 동예, 읍루……그리고 졸본부여를 이은 고구려. 이 많은 나라들의 꿈은 단 하나. 고조선의 전통을 잇고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것. 당연히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고조선 열국들의 운명이다. 게다가 고조선의 후신들인 이 열국들이 난립한 고조선 영역을 벗어나면 중국이 있었고, 이 중국 땅에는 진나라가 중원에 통일 국가를 세우고 동침(東侵)을 일삼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대업과 합치된 나 비류는 이런 상황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해갈 것이니 이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정보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 상황들 속에서 지금, 내가, 아홉 살 비류인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아야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미래의 분국을 막고 강대한 하나의 나라, 고조선과 같은 강력한 하나의 나라를 만드는 일. 세 나라가 싸우다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에 망해 종국에 고조선의 국토의 많은 곳을 잃게 만드는 일을 막아야 한다. 지금의 한반도 영역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금의 일본열도도 실제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한민족의 영토가되게 해야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변질되어 생기는 일 또한 막아야 한다.
고조선의 영토만큼이나 넓어진 꿈 크기에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하지만 꿈은 꿈,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망상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골몰하기 시작했다.
아홉 살 비류라는 사실이 답답해진다. 당장 아침 눈을 뜨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원대한 꿈들이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떼 같아진다. 속절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 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방법을 찾을 것이다. 무엇이든 방법을 반드시 찾고야 말 것이다.
나는 먼저 해야 할 일들의 순서를 정한다.
<8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