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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Sep 15. 2023

입춘(立春)

주말은 주말이고 봄은 봄이다

주말의 시작점에 와 있다. 서류를 제본할 일이 있는데 내가 사는 동네엔 제본소가 없었다. 다음주 금요일까지 수신처에 도달해야 하는 서류이기에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껴서 저 멀리 킨코스 강남역센터까지 가게 되었다. 마침 그 근처인 역삼에서 원데이 독서모임이 하나 잡혀있기도 해서 손해보는 결정은 아니었다. 아침 7시에 출발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졸다 깨다 하면서 온 것 같다. 택시의 유혹에 잠시 빠지려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는 나를 강남역과 매우 근접한 곳에서 내려주었고, 나는 그 길로 킨코스로 향해 이런저런 옵션을 선택하여 제본을 맡겨두었다. 오전 11시 넘어서 찾으러 오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 애인에게 두어번 카톡을 보내보았는데 답이 없어서 자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얼마 후에 답장이 왔는데 역시 자고 있었던 게 맞았다. 예측 가능한 남자와 함께 지내고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다. 지금은 킨코스 뒤쪽 골목에 자리잡은 스타벅스에 앉아서 이런저런 잡문을 쓰고 있다.


오늘은 주말이고, 블로그씨의 정보에 따르면 24절기 중 맨 첫번째인 입춘이라고 한다. 입춘이라는 한자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봄'을 '세운다'라는 뜻이지만, 바깥 날씨는 그 말을 믿기 힘들 만큼 완연한 겨울이다. 한때 주말과 봄이 매번 돌아온다는 두 가지 사실에 전부 무감각하던 나날들이 있었다. 주말 앞에서 무덤덤하던 기간은 비교적 정해져있는 편이다.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 시절을 지나서도 여전히 취업 시장 근처에서 표류하고 있을 때. 수험생일 때엔 주말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그랬고, 백수로 놀고 있을 때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를 체감하지 못해서 그랬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던 시기는 조금 더 길었다. 작년 봄에 나는 꽃구경을 가지 않았다. 같이 갈 사람이 딱히 없었거니와 수험생이었다는 그럴싸한 대외적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속내를 얘기하자면 그 따위 꽃이라든가 하는 봄의 전령들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냉소적인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말은 주말이 아니었고 봄은 봄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로 그랬다.


이쯤에서 지금 시간 이후의 이번 주말 일정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일단 12시 무렵에 제본한 서류를 찾아서 결제를 마치고 나면 근처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역삼의 모임 장소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행복의 기원"이라는 심오한 제목의 책을 놓고 심리학자 리더님의 가이드 하에 진행되는 시간이다. 책을 인상깊게 읽은 편이라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많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일은 일주일만에 찾아온 데이트 시간이다. 애인의 단골 카페에 가서 그야말로 무한히 글을 뽑아낼 야심 같은 야심을 갖고 있다. 비록 겨울은 길고 봄은 짧지만, 나와 애인은 우리가 처음 손을 잡았던 석촌호수에서 벚꽃 놀이를 하고 올 계획을 짜놓은 지 오래다. 딸기 디저트 뷔페도 코스 물망에 잠시 올랐었지만, 애석하게도 둘 다 PT를 받으며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라 그 선택지는 내년으로 미루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밖에도 봄에 우리가 갈 수 있는 야외 데이트 코스는 얼마든지 있다. 아직까진 그에게 보여주지 못한 곳들이 많고, 나 역시 가보지 못한 곳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가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봄을 즐길 곳들은 많다. 아주 많다.

주말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던 시절. 바깥 세상에 봄이 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수험서에만 코를 박고 있었던 시절. 누구에게 들이밀어도 질색할만한 무미건조한 생활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모노톤의 세월을 지나왔기에 지금 나의 일상이 한층 더 선명한 색채들로 반짝반짝 빛을 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일주일 중에서 단 이틀이라도 내가 일하는 지역아동센터의 파워풀한 초등학생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아직은 체감조차 할 수 없는 봄이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기대감을 품는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런 소소한 기대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Thanks God, It's Friday. 봄이여, 오라.


(2023.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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