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 앞에 진지해질 일이 없는 것이 베스트
"이제 좀 여유가 생겼나보네."
오늘 애인과의 점심 시간 통화에서 그가 했던 말이다. 내가 별 생각 없이 "자기는 요즘 어때? 특별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이 잔잔한 거야?"라고 안부를 물었을 때의 반응이었다. 그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려면 저 말의 앞에 소괄호를 치고 '내 기분을 챙기는 걸 보니'라는 부연설명을 붙여야 할 것이다.
맥락을 이해해야 그의 반응이 바로 보인다. 최근 나의 상태를 돌이켜보자면 그가 저렇게 나올 법했다. 왜냐하면 나는 근 몇 주간 몸도 마음도 모종의 침체기를 꽤 오래 겪고 있었고, 이런저런 노력에도 상황이 악화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오늘 활로를 찾기 위한 확실한 노력을 기울이는 데에 성공했고,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안심하게 되었나보다. 나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다시금 생겼고, 그로 인해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타인의 안부를 비로소 챙기게 되었으니.
"이제 좀 여유가 생겼나보네."라는 그의 말을 맨 처음에 들었을 때엔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 못지 않게 그 또한 일터에서 버티는 하루하루가 만만치 않을텐데, 요즈음 나 자신의 컨디션 난조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안부를 묻지 못했다는 사실에 반성했다. 그 다음으로 든 감정은 그가 나의 상태를 자기 일처럼 챙기고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지나가는 얘기처럼 흘러간 나의 말 한마디를 통해 내 마음 안에 실낱같은 여유가 생겨났다는 사실을 감지해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든 감정은 나의 앞일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이제 서서히 나아질 수 있겠다, 조금씩은 활로가 뚫릴 것 같다, 앞으로는 괜찮겠지 등등 비관 대신 긍정적인 전망을 품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통화가 끝나기 전,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그랬던 것처럼, 네가 먼젓번에 그랬던 것처럼 적정선을 지키며 서로에게 기댈 수 있으면 좋겠어. 너도 나처럼 다시 얼마든지 나한테 기대도 돼. 어쩌면 저 말을 해놓곤 혼자서 그 얘기에 잠시 취해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는 듯 아래와 같은 말로 내 말을 받아쳤다.
"서로 괜찮아서 그럴 일이 없는 게 베스트지."
아...과연 현명한 답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23.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