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오래가는 여친필터
경기 구리시 교문동에 자리잡은 구월서가. 위에 첨부한 흑백 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사진 한가운데서 책상 위에 아이패드를 올려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자는 지금의 내 연인이다. 사진이 찍힐 때만 하더라도 그는 지인과 연인 사이의 스펙트럼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이 나에게 올지 말지를 두고 불확실한 전망을 세웠다 무너뜨리길 거듭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진이 찍힌 시기는 아마 작년 9월 초였던 것 같다. 그는 내게 서점의 책방지기님이 찍어준 거라면서 흑백 필터를 씌운 이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 사진 속에서 자신의 복부는 신경쓰지 말라고. 나는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자세히 보게 된다는 장난을 치면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평범한 일상의 풍경조차 그림이 되는구나. 내가 사랑하는 그의 모습이 바로 그림이로구나.
이후로 몇 가지 사랑스러운 이벤트를 거쳐 우리가 연인이 된 이후에도 내 눈에 뭔가 씌어있긴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그의 독사진을 볼 때마다 내 눈에 단단히 씌워진, 이른바 '여친 필터'가 발동했다. 특별한 장소에서 공들여 찍었든 일상의 배경에서 아무렇게나 찍었든 공평하게. 예를 들어 작년에 그가 내게 보내준 사진 중에서 사무실의 제 자리에 앉아 두 팔로 턱을 괴고 졸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진을 여전히 내 PC의 폴더 하나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우리가 썸을 타던 시기에 그가 자켓 입은 데일리 룩을 셀카로 찍어 보내준 적이 한번 있다. 배경은 자기 집의 화장실이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배경까지 신경쓰진 않았던지 세련된 옷차림 뒤의 배경엔 붉은 다라이(대야)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등 매우 '내추럴'했다. 그런데 사진을 받은 내 눈에 배경이 들어온 건 아주 잠깐 뿐이고 곧이어 내 시선은 온통 그의 착장으로 집중되었다. 물론 이 사진 역시 내 PC의 폴더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폴더의 이름은 심플하게 그의 이름 석 자.
가끔은 생각해본다. 내 눈에 씌워진 여친 필터가 앞으로 과연 얼마 동안 유효할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추측 정도는 할 수 있다. 카이스트 교수 정재승은 사랑할 때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썸의 시기에 분비되는 호르몬은 6개월 정도 유효한 아드레날린이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주체가 안되는 단계라고 한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면서 부각되는 호르몬은 2~3년을 간다는 도파민이다. 연애 초기의 불타는 감정, 만나면 마냥 붙어있고 싶고 서로 만지고 싶다는 욕구. 모두 도파민의 영향이란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나오기 시작해서 평생을 갈 수 있는 호르몬은 옥시토신이다. 신뢰와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으로 일상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우리는 아드레날린에서 도파민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지 않나 싶다. 그렇지만 나는 나만이 갖고 있는 여친 필터를 평생 가지고 가고 싶다. 어떤 배경에서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든 관계없이 존재 자체로도 그림이 되는 남자를 오래도록 보기 위해.
(2023. 4. 22.)